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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용흥사지 [경남도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경남도는 지난 5월 8일 창녕군 성산면에 있는 불교 유적 '창녕 용흥사지'를 도 기념물로 지정 예고했다.
경남도는 용흥사 터가 건물 배치 형태, 평면 구성을 통해 조선 후기 산지 가람 배치를 잘 보여주는 창녕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으로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있어 기념물로 지정한다고 설명했다.
창녕군은 우포늪을 아울러 그 전역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그 가치와 중요도 차원에서 우선 순위에 꼽히는 지역으로, 우포늪 생태체험장을 찾는 탐방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 곳이다.
사실상 용흥사는 한반도 발흥 종교(국교)와 제례의 전개 및 그 성격으로도 추정 가능하듯 "용"자가 들어가는 사찰명은 일 예인 "용흥사"만으로도 창녕 외 전국 전역에서 발견될 만큼 왕족과 귀족층은 물론 민가로도 그 영험력의 상징으로도 전파된 사찰명이다.
▷ 아래 글은 먼저 경남도 창녕의 용흥사에 대하여, 2024년 동국대학교 역사교과서연구소 발행의 "창녕 용흥사(지)의 역사와 의의" (저자 황인규)의 논문을 중심으로 기술한 것이다.
▷ 그 전에 먼저, 창녕 용흥사 터가 입지한 비슬산에 대하여 간략히 기재하고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 봉우리인 관기봉(觀機峰)은 "신라 시대 고승 관기성사(觀機聖師)가 수도한 곳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라고 그 정상석에 기재되어 있는 곳으로,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그 기록이 남아 있는 유래 깊은 곳이다.
관기봉[992.0m]은 서쪽·북쪽으로 대구광역시 달성군, 동쪽으로 경상북도 청도군, 남쪽으로 경상남도 창녕군이 위치한 삼도의 경계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용흥사는 창녕 비슬산 지역의 중요 사찰이었으나 현재는 없어졌으며, 관련된 문헌 기록으로 조선후기 승려 벽암 각성의 문도인 동계 경일과 남유용의 기문 등이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 문헌에는 간략히 그 창건에 관한 것과 같이, 임진왜란 이후, 특히 숙종과 영조와 정조대의 중창 및 폐사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 가능하다.
용흥사는 신라의 고승 관기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그 후 고려시대 1177년(명종 7) 승려 효초 등이 발원하여 "향로"를 주조하였다.
고려말 승려 각료와 신도 곽항이 중창하여 요항사라고 하였던 것 같으나 조선초 억불시책을 거치면서도 존립했으나 임진왜란시 불타 폐사에 이른 듯 보인다.
1614년(광해군 6)에 승려 지혜가 그 요항사의 터를 보고 개탄하여 20여 년간 중창하여 용흥사와 6암자로 재창건을 하였는데, 1631년(인조 9)부터 1651년(효종 2)까지 승려 사경 등이 대웅전 등을 중수하였다.
숙종대에는 주지 종혜와 엄공 등이 중창하여 낙동강 서쪽의 총림이 되었는데, 발굴된 명문에 의하면 차명룡 부부는 1694년(숙종 20)에 용흥사에 시주하였으며 그 무렵 용흥사 건물의 재목이 1695년(숙종 21)에 연암서원을 짓는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더 앞 서 중국 중원까지 진출하여 희씨 황족으로 세력을 키우다 상나라의 내분 가운데 재동진(東進)하여 한반도 고조선을 이루는 과정에 희씨는 성을 여러 차례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였는데, 신갑 성씨, 왕 씨, 조명, 전씨, 신씨, 차씨 등과의 연계 아래 성을 바꾸었고 한나라의 집요한 낙랑 정책 아래에는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와 타 혹은 대체로 차(shar) 등의 성씨로 살았다.
삼한 이후 삼국이 클 때 경상도 신라국의 진골화 되고 관직은 승상까지 이르렀으나 애장왕조에 가주 차승색 부자가 신라 성골들의 다툼 가운데 서북으로 달아나 몸을 숨기고 살며 문화 류씨로 한 번 더 개명하게 된 것으로서 그 세계보(世系譜)가 전해온다.
1705년(숙종 31)에 창녕 출신 문인 윤우갑은 죽림재를 짓고 살면서 용흥사에 와서 시를 남겼다.
용흥사는 여지도서나 가람고 등에도 새롭게 추가 기록되었고, 18세기 「광여도」, 「해동지도」(1724년), 「지승」, 「동여도」, 「창녕군 읍지」 등에도 기록이 보인다.
대구 동화사에서 1728년(영조 4) 「삼장보살도」와 「지장시왕도」 조성시에 용흥사 화사 의균이 불사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에 의균이 창녕 용흥사 「아미타설법도」도 제작하였는데, 이 불화의 “창령 용흥사 조경 극행 비구”라는 기문에서 용흥사 승려 조경과 극행 등이 참여하였다.
한편 용흥사의 표충사 제향 참사록에 의하면 1749년(영조 25) 부터 1813년(순조 13)까지 10 여 차례 참사하였다. 창녕 용흥사 승려 선일, 순행, 수한, 설허지연, 보관, 용파도주 등이 밀양 표충사 춘추 제향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영조 이후 정조 및 순조, 고종대의 지리류에도 용흥사가 찾아진다. 예컨대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 권1에서도 찾아진다. 의례집 춘관통고에 의하면 1788년(정조 12)경 이후 성균관에 매년 흰 종이 50권을 바치도록 하여 받든 것으로 보인다.
승려 득림은 전답을 시주하였고 득찰과 도반으로 용흥사 불사에도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826년(순조 26) 당시 예조의 관문에 의거하여 영조의 서녀인 화령옹주의 방원당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즉, 용흥사는 화령옹주의 원찰이 되었고 부속 암자로는 심적암, 은적암, 극락암, 각료암, 남암, 북암 등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관보에 주지 임명에 관한 기록이 보이다가 폐사되었다.
참고로, 화령옹주는 영조가 총애하던 후궁 "숙의 문씨"의 딸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아들 정조와는 점차 원수(?) 같은 사이가 되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화령옹주의 어머니 숙의 문씨는 사도세자를 음해한 죄인이라고 매도당했는데 문씨의 친척들도 그동안 저지른 악행들이 알려지면서 죄인으로 전락하고 처벌 받았다.
숙의 문씨는 본래 영조의 서장남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 조씨를 모시는 궁녀였는데 현빈 조씨의 장례를 치를 때 영조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고, (옹주 둘 만 둔 주제에)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게도 대들다가 노한 대왕대비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를 맞은 전력도 있었다. 영조와 사도세자 간의 불화와 알력을 너무 좀 눈치챈 것으로도 보인다.
숙의 문씨는 폐서인이 되어 유배를 간 뒤 사약을 받아 처형을 당했고 화령옹주의 동생 화길옹주는 일찍 요절하여, 문씨의 살아있는 유일한 자녀에 대하여 조정은 효종 대 귀인 조씨 자식들의 예와 같이 직첩을 빼앗고 서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들까지 거세었으나 정조는 당시 화령옹주는 강보에 쌓인 어린 아기였다 하며 선처했다.
정조는 영조에 이어 탕평책을 펼치려 한 임금으로도 알려져 있다. 다만 서학자들은 크게 탄압했다.
이후 화령옹주는 1821년(순조 21)에 사망했는데, 정조의 아들 순조는 장생전의 퇴판 1부를 보내주고 그 장례를 왕실 종친의 예우로 치러주었다.
화령옹주의 부마는 1764년(영조 40) 10월 16일 삭녕군수 심정지의 아들 심능건이 부마로 간택되었었고, 순조의 왕비는 안동 김씨 세가 김조순과 심건지의 맏딸 청송 심씨의 딸 사이에 태어난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다.
한편, 대조하여 소개하자면 담양에 소재하고 있는 "용흥사"를 들 수 있다.
담양 소재의 용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로, 백제 때 창건되었다고는 하는데 조선 후기까지의 연혁은 전혀 전하지 않고 있어 자세한 역사는 보증 할 수는 없다.
본래는 ‘용구사’라고 했다는데, 조선 숙종(1674∼1720) 때 숙빈 최씨가 이 절에서 기도한 뒤 영조를 낳자 이후 절 이름을 용흥사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그 때부터 산 이름도 몽성산으로 고쳐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영조가 태어난 이후로 약 50여 년간 절이 발전하여 한때 산내 암자만 7개나 있었고 큰스님도 머무르며 불법을 폈다고 전하는데, 19세기 말에 의병의 본거지로 쓰이다가 불에 탄 것을 박항래가 중건하였다.
1930년대에 백양사 승려 정신이 대웅전과 요사채를 세웠으나 1950년 6·25전쟁 때 다시 불에 탔고, 1957년에 중창하여 1970년대에 대웅전을 새로 지었고 1990년대부터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용흥사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요사채 2동이 있다. 이 중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과 산신상, 영산후불탱화를 비롯하여 칠성, 독성, 산신탱화가 모셔져 있으며, 제석천룡 도와동종, 소종 등도 놓여 있다.
유물로는 보물로 지정된 용흥사 범종이 잘 알려져 있다. 1644년(인조 22) 조성된 것으로 종신에 적힌 명문에 따르면, 당시까지 절 이름은 용구사였음을 알 수 있다. 높이 78㎝, 입지름 66㎝로서 조각기법이 매우 뛰어나다.
절 입구 극락교 왼편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용흥사부도군이 있다. 7기 모두 팔각원당형 부도로 퇴암의 부도가 1717년(숙종 43) 조성되어 가장 오래되었다. 그밖에 희옥과 일옥, 쌍인 등의 부도가 전한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전남 담양 소재 용흥사부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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