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했다고?…강정인 교수 별세

X
[유족 제공]

1993년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논문을 발표, 한국의 척박한 지적 풍토를 질타한 강정인(姜正仁) 서강대 정치외교학전공 명예교수가 지난 3일 오후 7시께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4일 전했다. 향년 만 70세.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교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마키아벨리(1469∼1527), 해나 아렌트(1906∼1975), 해나 피트킨(1931∼2023)의 저작을 통해 서양 정치사상을 익혔다. 1989∼2020년 서강대 정치외교학과에서 강의했다.

강 교수가 유명해진 계기는 1993년 12월 한국정치학회 연례학술발표회에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논문을 발표한 것이었다. 1993년 12월7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고인은 이 논문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관들이 '철학'을 포기하면 석방해주겠다고 회유했지만 "지혜를 사랑하고 덕을 추구하며 이를 아테네 시민들에게 깨우치는 철학적 임무는 신이 내린 명령이기 때문에 철학을 포기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즉 '비록 실수가 있을지라도 법은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우려고 부당한 판결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자신의 철학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순교했다'는 것이다. 강 교수는 한국의 척박한 지적 풍토 탓에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될 정도이며 역대 독재정권이 소크라테스의 권위를 빌려 시민의 무조건한 복종을 요구하는 빌미가 돼왔다고 지적했다.

2002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초등학교 6학년 도덕교과서에 실린 글 중 소크라테스가 탈출을 권유하는 친구 크리톤에게 "법은 국가와의 약속이다. 나는 법에 따라 재판을 받았고, 그것이 나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일지라도 지켜야 한다"고 말한 구절의 수정을 권고했고 이 부분은 후에 교과서에서 삭제됐다. 또한 2004년 11월에는 헌법재판소가 중학교 일부 사회 교과서가 준법정신을 강조하는 대표적 사례로 소개하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며 독배를 마신 일화'를 부적절한 것으로 지적, 그 수정을 권고하기도 했다.

고인은 또 북한 체제에 대한 진보학계의 '내재적 접근법'도 결국 북한 체제 옹호로 귀결된다며 비판했다. 송두율 교수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받을 때는 학문의 자유 차원에서 옹호했다.

서양 정치사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수많은 고전을 번역했고, '서구중심주의 극복'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번역서로는 '마르크스에 있어서 필요의 이론'(1990), '플라톤의 이해'(1991), '마키아벨리의 이해'(1993), '홉즈의 이해'(1993), '군주론'(1994), '현대민주주의론의 경향과 쟁점'(1994), '로크의 이해'(1995, 문학과지성사), '통치론'(1996), '민주주의란 무엇인가'(2018) 등이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적 초상:비판적 고찰'(1993), '북한 연구방법론:'내재적 접근법'에 대한 비판적 성찰'(1993),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1994), '한국정치의 민주화:권위주의 정권의 해체와 자유민주주의의 모호한 이념적 위상'(1995),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2004), '난 몇 퍼센트 한국인일까'(2004),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2005), '서양 근대 정치사상사'(2007), '한국 정치의 이념과 사상'(2009), '넘나듦(通涉)의 정치사상'(2013), '한국 현대 정치사상과 박정희'(2014), '죽음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교차와 횡단의 정치사상'(2019) 등 저서를 남겼다.

유족은 부인 유윤선씨와 2남(강세빈<예일대 의대 박사후연구원>·강세윤<치과의사>)이 있다. 빈소는 한림대성심병원 장례식장 VIP1호실, 발인 6일 오전 8시. ☎ 031-382-5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