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별곡에 붙여 (2회)

데스크 승인 2023.08.28 18:00 | 최종 수정 2024.02.29 21:34 의견 0

삽짝이 부서져라 밀치고 마당으로 뛰어들며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아버지가 놀라서 나왔다.

“선생님, 저 혜숙입니다. 강선생님, 정선생님도 함께 오세요.”

앗, 혜숙이라면, 내가 가끔 우체부 아저씨한테서 받아온 바로 그 편지의 주인공이다. 편지만 오는 날이면 엄니와 아부지가 나만 쏙 빼놓고 뭔가 쑥더궁 쑥더궁 해댔었기 때문에 분명 기억할 수 있다. 늘상 그게 궁금했다.

“날도 찬 데 이 시골 구석에까진 웬 일들인가? 하여간 이리들 들어오게.”

갑작스런 그들의 출현에 아버지는 반가운건지 싫은 것인지 도체 알 수 없는 묘한 얼굴로 모두를 들이셨다.

“그간 별 일은 없으셨지요? 그 때가 59년이니까 벌써 8년이나 됐군요. 이 애가 성화 맞지요? 참 착해 보여요. 아이, 강선생님, 정선생님도 무슨 말씀 좀 하시죠,”

동그랗고 반짝대는 아저씨 시계에 한 참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아줌마 말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조악거렸다. 우리 아부지 시커먼 팔뚝에는 시계가 안어울릴 꺼야.

“난 거두절미하고 이야기 하겠소. 최선생이나 나나 백발 성성할 때까지 책 봐야할 운명이라 나는 믿어요, 지난 번 보내 준 논문에 우리는 모두 놀랐다오. 두 눈 불끈 감고 다시 서요. 선생은 그저 묵묵히 백묵을 드는 것이 최선적인 거부의 몸짓이 아니겠오? 그저 내 나라 기둥을 세우거니 하고, 다시 시작해 봅시다. 뒷 처리는 내가 알아 하리다.”

예? 우리 아부지가 선생님이라꼬예?

“요즘 학교가 몹시 어수선 합니다. 왜, 아시잖습니까, 그 사람들. 이제는 숫제 이 편 저 편 나누어가며 찧고 까불어대요. 그래서, 지금 몇 뜻 있는 선생님들께서 참된 교육을 위해 힘을 결집하고 계십니다. 저희는 선생님이 필요해요. 사실 이제 저도 강단에 서게 된 입장에서 감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 때 선생님께서 학교를 쉬겠다 내려 와 버리셨을 때 저흰 몹시 실망했었습니다.”

나도 모르는 새 엉덩이를 들썩댔다. 다리가 저릿 저릿해 왔다.

“선생님께서 떠나신 후, 물론 학생들 보다는 훨씬 뒤늦은 일이었습니다만, 선생님들께서도 나름의 투쟁을 보여주셨습니다. 거기다 지금 상황은, 아니, 사실 전 복잡하고 미묘한 이데올로기 싸움이나 정치적 연계 따위의 것들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다만 올바른 곳에서 참된 교육이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은 굳게 믿고 있습니다.”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몰래 아버지를 훔쳐다 보았다. 언제 불을 댕겼는지 아버지 주위엔 담배 연기가 몽글 몽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저녁상을 물린 후 좋은 소식 기다리겠노나 거듭 인사를 하며 모두가 돌아갈 때까지 아버지는 연신 방 안을 불 지핀 너구리 굴로 만들어 대고 있었다. 매캐한 공기 속에 애써 펴 논 동화책도 뿌옇게 흐려만 졌다.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어머니도 유난스레 덜그럭 그릇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성화야, 이리 나오너라. 별이 많구나.”

하늘이 유난히 맑은 날이면 아버지는 꼭 별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 우리 아부지가 국어며 산수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애들이 우리 선생님은 뒷 간에도 안 간다고 그랬는데, 우리 아부지는 하루에도 두 번은 꼭꼭 갔다. 마당 구석에 놓인 이제는 쓰지 않는 옹달 시루에까지 별이 그득했다. 아버지는 계속 뚫어져라 하늘만 응시한 채였었다. 나는 습관대로 별을 세기 시작했다. 별 하나에 가슴이 콩닥, 별 둘에 심장이 쿵덕,

“성화야, 아버지, 서울 가서 선생님 할까?”

갑자기 별이 더 반짝대기 시작하고 하늘이 환해졌다.

“그냥 농사 지으면서, 성화랑 엄마하고 이렇게 시골에서 사는 게 더 낫겠지?”

숨이 가빴다.

“아니, 아니, 아부지, 우리 서울 가서 살아예. 동식이가 그라는데 서울에는 별 게 별 게 다 있다카데. 아부지가 샘이 되문 내는 공부도 더 열심히 할끼고, 착한 일도 많이 할끼라.”

막 신이 나서 소리쳤는데 아버지는 긴 긴 한숨만 내 쉴 뿐이었다.

우리가 서울로 이사가는 날은 그 해 겨울 들어 최고로 추운 날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를 비롯해 온 동리 사람 모두가 배웅을 나왔다. 오랜 만에 보는 할아버지의 웃음, 대견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는 동리 어른들, 호기심 가득 하게 이것 저것들을 물어대는 또래 녀석들의 부러움에 가득 찬 눈빛들, 이 모든 것들을 고향 마을에 남겨둔 채 우리는 그 긴 흙 길을 걸어 나왔다.

우리의 서울 생활은 별 탈 없이 지나갔다. 생각하기도 싫은 그 일이 있기 전까지의 서울 생활은 내게 있어 마치 꿈결과도 같은 것이었다. 꿔다 논 보리자루 신세 몇 개월에 시골 촌 닭 토끼똥 신세 몇 개월을 보낸 뒤 나도 그럭저럭 숫기를 벗고 도시 아이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말씨도 애써 바꿔 갔다.

“ 산 위 냇가에서는 보리밥 열매나 산머루를 따 먹었어. 여름 냇가는 아주 시끌 시끌해. 첨버덩 첨버덩 고기를 몰아 건져 올리다 보면, 운 좋은 날엔 손바닥 크기만한 놈도 딸려 올라와. 동식이는 고추장, 동형이는 시래기, 나는 냄비, 이런 식으로 하나씩 둘씩 모아서 얼거지 매운탕을 끓이는데, 사실 우리는 먹기만하고 끓이기는 일품 하는 만돌이 아제가 다해. 가을이면 산에 밤을 따러 갔어. 그건 주인 몰래 따야 되는데, 얼마나 가슴이 조마 조마 하는지, …… 한 번은 창섭이 새야가 떨어져서 다치는 바람에 그 해 가을엔 밤나무 곁에는 다신 얼씬도 못했어.”

거름내가 옷에 배들어 코가 맹맹해진 고향 동리 애들과는 달리 이 깔끔 맞은 서울애들은 트럼프 놀이며 전쟁 놀이 같은 걸 아주 잘했다. 고향에서도 전쟁 놀이를 안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저 풀뭉치나 흙덩이를 던지며 우 – 몰려다니거나 하는 고향의 좀스런 전쟁놀이와 이네들의 것은 무척 틀려 있었다.

신기한 듯 시골 마을 이야기를 듣던 서울애들이 차츰 싫증을 내 갈 무렵해서는 나도 트럼프 놀이쯤에는 자신이 붙어 있었고, 졸병에서 드디어 참모 총장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나는 공부도 썩 잘했다. 게다가, 아버지가 대학교 선생님임을 알게 된 애들이 한 껏 치켜 세우는 통에 제법 으쓱해 대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서울 생활에서 딱 한 가지 변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즐겨하던 별 이야기를 그만 두어 버린 일이었다. 보리밭 김만 매도 취한다던 우리 아버지가 하루가 멀다하고 술에 비척대며 들어오는 통에 그건 그만둬 질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아버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울 하늘에는 별이 그다지 없었다. 그래, 그게 더 큰 이유였는지도 몰라, 그렇지만, 난 그다지 섭섭한 줄을 몰랐다. 환한 대낮에도 마음만 먹는다면 번쩍대는 별을 얼마든지 구경할 수 있는 곳이 서울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순조롭게만 이어져 가던 서울 생활이 그 끝을 보게 된 것은 내가 참모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이른 첫 눈이 운동장을 소복히 메운 12월의 어느 날, 우리는 교실 구석에서 몇 씩 무리를 지어 떠들어 대고 있었다. 공부도 잘했고 힘도 세었지만, 아버지의 후광이 전혀 작용을 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는 참모 총장의 자리에 올라 앉은 내 곁에는 병약해서 골골하는 애들 몇, 공부를 못하는 덩치 몇을 포함해서 열 명 남짓의 졸병들이 둘러 서 있었다. 방학 동안에는 모두 모여 트럼프의 제왕을 뽑는 게 어떨까? 야, 그러면 분명 성화가 왕이 될 꺼야. 우리는 몹시 즐거운 냥 키들키들 웃어댔다. 그 때 찬바람을 휘익 안고서 부대장 우익이가 교실 문을 요란히 밀어 젖히며 뛰어 들어 왔다. 아버지가 무슨 큰 공장의 사장이라는 녀석이었다.

“야, 참모. 대장님이 모두를 철봉 옆에 집합 시켜 놓으래. 지금 당장. 늦으면 국물도 없어.”

날은 무척 찼다.

“야, 선생님이 곧 오실 텐데, 어떻게 가니?”

나는 짐짓 목소리를 돋우어 가며 되물었다. 쳇, 큰 집에 살면 단가?

“대장이 선생님께 허락 받으러 갔어. 지금 당장이야. 늦으면 안돼.”

에이, 기만이 녀석 또 무슨 일이야? 우리 대장 기만이는 아버지가 대장이었기 때문에 덩달아 대장으로 추대 된 애였는데, 배가 띠띠하게 나오고 얼굴이 넓적 둥글 둥글한 뚱보였다. 별 잘하는게 없어서 대장이 되기에는 부적합했지만, 담임 선생님과도 친하고 종종 외제 초콜렛이며 과자 따위를 나눠 주곤 했기 때문에 인기는 있는 편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 과자며 초콜렛 따위는 우익이가 가져다 준 것들로, 그럴 때마다 기만이 대장은 딴 애들에게 우익이 가방을 들어다 주어라, 숙제를 해주어라, 시키는 등 꼭 그 보답을 해주는 눈치였다.

내 기분만 슬슬 살피던 녀석들도 내가 교실문을 나서자 우루루 따라 나왔다. 유난히 깊이 패인 철봉 아래에는 발목이 푹 푹 빠질 만큼이나 눈이 쌓여 있었다. 시린 바람 끝에서 모두 차렷 자세로 대장을 기다렸다. 얼마 후 기만이와 우익이가 느림뱅이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우익이 손에 무엇인가가 들려 있었다.


“모두 모이라고 한 것은 내가 아주 멋진 걸 보여 주기 위해서다.”

기만이 녀석의 부른 배가 씰룩댔다. 여늬 때와는 달리 눈동자가 반짝대고 자못 의젓하기까지 했다.

“자, 우익 부대장. 그걸 이리로.”

까만 상자에 든 것을 우익이가 끄집어 내어 대장에게 넘겼다. 지는 겨울 석양에 번쩍 빛을 발하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꼭 진짜 같은 기다란 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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