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케르만 할릴강 인근 4천년 전 자극적 붉은색 안료 분석...립스틱 용도 단정에는 다른견해 가능성

류임현 기자 승인 2024.03.13 12:56 | 최종 수정 2024.03.13 14:00 의견 0

"액체형태…붓으로 발랐을 듯"…현대 이란 보수정권은 화장 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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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서 발견된 약 4천년 전 립스틱 [Scientific Reports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현존하는 피부 착색 안료로 추정되는 물질이 든 원통이 2001년 이란에서 발견되었다.

13일(현지시간) 미국 ABC 방송 등에 따르면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교 등 소속 연구진은 지난달 영국의 과학 저널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에 그 원통 및 내부에 든 물질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연구팀은 이란 남동부 케르만주(州) 할릴강 인근에 있는 기원전 묘지에서 지난 2001년 발굴된 원통형 용기와 내용물로, 길이 2인치(약 5㎝), 너비 0.75인치(약 2㎝) 크기의 해당 용기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약 4천년 전인 기원전 1936년∼기원전 1687년 사이 제작된 것으로 드러났으며 용기 안에는 분말 형태 물질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내부 물질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짙은 붉은색을 띠는 산화철 광물인 적철석이 다량 함유돼 있었고 현대 립스틱에서도 많이 쓰이는 식물성 기름과 왁스도 포함돼 있었다.

현재 연구진은 "모든 성분을 합치면 오늘날의 립스틱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현재 이 물질이 오랜 시간을 거치며 탈수되었고 분말 형태로 변한 것이라고 밝히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본즉 원래는 붉은색 액체형 립스틱(립 페인트)이었다는 점이 드러난다고 부연하고, 과거 사람들은 붓을 이용해 이 립스틱을 발랐을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진은 전했다.

다만 기자가 판단키로는, 실상 인류는 선사의 원시 시대로부터 가면을 쓰거나 현재 군인들과 같이 보호색을 위한 착색을 한 것으로도 추정가능한 즉 현재 연구진의 립스틱 결론에 대하여는 이견 혹은 다른 판단이 있을 수 있다고 보고 관련된 후속 연구 결과도 기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원통이 작은 만큼 가는 붓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로써 립스틱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결론에도 일견 수긍은 가나, 인류는 현재도 점이나 문양등을 신체 새기는 일종의 "타투" 욕구나 필요가 다양하게 전래되고 있는 만큼 그런 등 용도로 쓰였을 가능성등을 배제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단순히 여성용으로만 국한되는 립스틱 용도로만 쓰였다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하여 당시 인근 지역을 인디오등의 (복합) 이주 경로등으로 더 확장된 가설까지를 제기하겠다는 것은 섣부를 수 있으나, 페니키아인 이주등 무역과 교통 요지 인근 지역에 대한 판단에 있어 현재의 이란사회만을 비추어 가정내 여성 치장 도구만으로 단정짓기는 어느 켠으로도 부족할 수 있다는 뜻이다.

원통에 새겨진 꽃 잎 장식 무늬외, 선명한 양각의 변형적 빗금 빗살 무늬에도 시선이 꽂히지 않을 수 없다.

미 워싱턴포스트(WP)는 이 립스틱이 현재 여성 화장을 제한하는 보수적 국가인 이란에서 발견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란은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립스틱, 매니큐어 등 화장을 금지했으며 지금은 관련 규제가 완화되긴 했으나 정부 관계자, 의대생을 비롯한 여성이 화장하는 것이 여전히 금지되어 있다.

▷ 타투 및 부적등에 대하여 부연 기재해 둡니다.

; 필자(본 지 기자)는 타투 및 암각, 부적등에 대한 각 기원과 연원에 대하여 엄밀하게 분립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인류 및 그 사회의 기원의 추정등과 같이 대략 살펴보자면,

먼저 타투 행위는, 일,이인을 포함한 최소 소규모의 사회에서도 쉽게 주위의 어떤 색칠, 혹은 착색 소재로도 가능한즉, 사냥과 채집으로 특징되는 구석기 시대부터 연원 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물론 그 욕구나 필요 행위에 주술이나 제례적 의식이 더해진 것은 오히려 더 이후로 봅니다. 구석기까지로 연원이 올라가는 선사시대 벽화와도 직접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합니다.

암각의 경우는, 최소한 망을 봐주는 무리 또한 요구되며 작업이 큰 즉 구석기 말기 이후 최소 신석기 시대 전개 과정 가운데 날카로운 암각 도구 및 더 커진 사회 무리의 커뮤니케이션등을 배경으로 한다고 봅니다.

실상 욕구든 필요든, 주술과 제례든, 신석기 초기 빗살(빗금)무늬 토기보다 연원이 더 오래였다고 단정하기는 힘듭니다만, 도형 양태 및 암각 커뮤니케이션의 전개가 또한 토기의 전개보다 더 뒤에 연원 되었다고 단언하기도 어렵습니다.

그 외, 부적의 경우가 가장 뒤에 주술과 제례의 것으로 전개된 양태로 볼 수 있겠으나, 그 또한 좀 더 넓게 보자면 (종이에 그려진 붉은 부적만을 부적으로 정의하기는 힘든 만큼) 사실상 타투, 그림, 동굴문화로부터 암각과 사냥등을 목적한 각종 칠과도 같이 전개되었고 그 것에 좀 더 주술적 의미가 보태어져 전래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결론은 발생의 근원의 뿌리가 같다고 보는 것에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며, 셋을 나누는 구분보다는, 언제부터 좀 더 인류의 주술 제례적 의식이 (좀 더 어떤 양태로) 담기기 시작했었고 어떤 양식으로 어떤 부족에게서 전래 되었느냐등의 판단이 보태지는 것이 더 타당할 것으로 봅니다.

(실상 인류 옴므(호므) 샤피엔스는 각종 동물 무리와도 다르지 않은 모계의 일차적 1,2(~3)인 무리 사회로부터, 샤-(세워)의 전래와 같이 전개되는 종족으로 갈래 특징지어진다고 해도 무방할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삶/죽음의 육체와는 다른 영혼에 대한 자각 혹은 구분, 좀 더 나아간 경신 자체가 인류 (정신) 사회를 가능하게 했거나 구분 짓는 큰 특징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물/인류를 굳이 구분하려는 노력들에 대한 부언입니다. 단순히 모성애, 마음, 두뇌 용량의 크기등은 그 구분의 척도가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추가해두자면, 일반적으로 최초의 타투는 우연에 의해 발생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 가운데, 가벼운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일종의 치료 행위로 어떤 물질로 상처를 문지르는 과정에서 영구적으로 남은 자국이 최초의 타투의 기원이 되지 않았을까 추정되기도 합니다.

타투의 고고학 혹은 유물적 기원은, 약 5천년가량 된 냉동 상태의 남자사체 한 구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국경근처의 산에서 발견되면서 5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것을 확인된 사실입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청동기 시대인의 사체 중 가장 그 보존 상태가 좋은 이 냉동인간 몸에는 모두 57개의 타투가 새겨져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류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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