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쓰고 도포 입은 김대건 신부 성상 바티칸 입성 ... "서학" 박해의 "순교자들 영웅적 모범"

교황 "한국 순교자들, 어려운 시기 위로주는 영웅적 모범"

류임현 기자 승인 2023.09.23 15:12 | 최종 수정 2023.09.23 15:14 의견 0

교황 "한국 순교자들, 어려운 시기 위로주는 영웅적 모범"

(바티칸=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상 축복식이 16일(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의 설치 장소 인근에서 거행되고 있다. 2023.9.17 changyong@yna.co.kr

16일 오후 4시 30분(현지시간) 가톨릭의 성지인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외벽에서 김대건 신부 성상 축복식이 거행됐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성인의 성상이 성 베드로 대성전에 설치된 것은 성전 역사상 처음 거행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일(현지시간) "어려운 시기에 위로를 주는 영웅적인 모범 사례"로 한국의 순교자들을 꼽았다. 교황은 이날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주례한 수요 일반알현 말미에 전 세계 신자들에게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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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바티칸에서 한국 가톨릭 대표단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교황청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교황은 축복식을 맞아 바티칸을 찾은 한국 가톨릭교회 대표단과 만나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평화의 사도'가 돼 달라"고 당부했으며, "한반도의 평화를 언제나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다"며 "한반도 평화라는 꿈을 우리 함께 김대건 성인에게 맡기자"라고도 했다.

우리 정부는 교황과의 알현으로 2027년 세계청년대회 개최지를 서울로 결정한 점에 사의를 표하고, 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교황은 "한국의 순교자들은 도전적인 선택을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지원의 원천이자 어려운 시기에 위로를 줄 수 있는 영웅적인 모범"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 충남 당진 우강면 송산리의 솔뫼성지 기념터. 기념상으로 흰 교황 사제복과 당의를 입은 여아, 남루한 선비복과 도령복의 남아가 같이 손을 잡고 서 있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순교자들을 기리기 시작한 것은 1926년부터다.

이전 해인 1925년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 등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순교자 79위가 시복(복자로 선포)된 것이 계기였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당시 시복된 복자 중 가장 많은 수가 순교한 9월 26일을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로 정하고 매년 기념했다.

이어 1984년 방한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순교복자 103위가 시성(성인으로 선포)된 것을 계기로 한국 순교복자 대축일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바꿔 불리게 됐다.

날짜도 9월 26일에서 9월 20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 정부측의 강 수석은 폴 갈라거 교황청 외교장관 만난 자리에서, 교황청이 해방 이후 최초로 외교사절을 보내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유엔총회에서 합법적 정부로 승인받는 과정에 크게 기여하고 6·25전쟁 전후 복구지원을 해준 점에 감사를 표했다.

서학 박해로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던 김대건 신부를 기리는 동상. 식민지 마카오의 포르투갈 귀족의 별장지였던 까사가든에 건립되었다. 현재는 동방기념회 소유로 포르투갈 군인이자 시인을 기념하는 공원화 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는 한국인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이자, 순교자, 여행가로,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며, 2021년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되었다.

1821년 8월 21일 충청남도 당진 솔뫼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제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헌부감찰과 통훈대부를 지낸 8대조 김수완 때부터 솔뫼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9대조 김의직이 충청병마절도사 재직시 임진왜란에서 전훈을 세우고 대대로 토지와 벼슬을 보유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84년 경 김대건의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내포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자 하급 관리였던 증조부 김진후도 관직에서 물러나 입교 신앙 생활을 해 가문이 천주교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신유박해로 증조부 김진후는 1801년부터 감옥에 드나들었고 1804년에는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 10여 년간의 옥살이 끝에 1814년에 옥사하였다. 또한 작은 할아버지 김한현은 1816년 안동에서 체포되어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 당하였다.

기해박해 여파로 아버지 김제준은 아들 김대건을 서양에 사제 수업을 받게 하기 위해 유학을 보낸 중죄인으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하였고, 또한 당고모 성녀 김 데레사도 앵베르 주교의 처소를 돌보며 신앙을 전파하다 체포되어 1840년 초 서울포청에서 교사 당했다.

김대건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자가 나왔다.

김대건 신부는 교세 확장 보다 더 시급한 외국 선교사의 입국과 주청(駐淸) 선교부와의 통신연락에 필요한 항로 개척을 위해 입국했고, 1846년 6월 5일 천주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전도할 수 있는 항로를 그린 지도를 중국 어선에 넘겨주려다 연평도 부근에서 관헌들에게 체포되었다.

일부 대신들은 김대건의 박학다식을 높이 사고 구명운동을 벌였으나, 김대건이 신학공부와 사목을 위해 외국인들과 접촉한 사실로 처벌해야 한다는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에 따라 그해 9월 15일 조선에서 금한 천주교를 믿는다는 죄로 참수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새남터에서 천주교 사제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25세였다.

2002년 김해 김씨 안경공파에서 천주교 성인공파(天主敎 聖人公派)로 분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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