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별곡에 붙여 (1회)

(저자는 마지막회의 바이라인 기재. 단편.)

데스크 승인 2023.08.22 14:59 | 최종 수정 2023.08.22 15:15 의견 0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두 번째 가는 셈인가? 고향 김해의 짠 내 섞인 강 바람이 전신으로 감겨왔다. 끈끈한 해초 내, 하늘은 이미 짙도록 어둡다. 서울에서 7 시간 남짓의 지리한 시간을 달려와 잠시의 쉴 틈도 없이 김해행 막차를 올라 탔던 그는 일순 뿌리 칠 수 없을 것 같은 나른과 무기력을 느꼈다.

차창을 흔들어대며 뒤멀어지는 검붉은 흙바람을 그저 망연스레 내다보며 앉은 그를 아는 채 하던 이들이 줄잡아 열은 넘었었다. 그 중에는 후덕하기로 이름 난 숙부도 끼여 있었는데, 예의 그는 저문 날을 걱정하며 하룻 밤 쉬어가기를 진심으로 청했었다. 부산까지 나가 겨우 구해 왔다는 무슨 신경통약을 신주 단지나 모시듯 안고 있는 숙부는 그 몇 해 사이 더욱 야위어 있었다.

“지난 분에도 얼매치나 안 묵었겠나. 그린데 도통 나을 줄을 모르는기라, 내도 이라다가 성이 애비맨키로 허리를 영 몬 쓰지 싶다. 눈이 돌구로 바쁜디 내 부산까정 자꾸 나가는 것도 성가시럽고, 그 보다도 그 놈의 약 값이 우찌나 엄청한지, ……”

곤한 몸을 이끌어 급히 발 길을 내 몸 이유에는 좁은 방이나마 지치고 아픈 허리를 펴고 눕고만 싶을 숙부의 마음 고생을 덜어 주고 싶은 씁쓸한 안쓰러움이 없잖아 있었다. 듬성 내닫는 발등에 개구리 한 마리가 툭 하고 부딪히더니 혼비 백산 이리 풀쩍 저리 펄쩍댔다. 녀석, 자기보다 몇 십 백배나 큰 놈한테 부딪혔으니 좀 놀랐을까? 혹 밟혔다 해도 가해자인 자신에게조차 눈에 띄지 않을 무력하고도 조그만 몸뚱이를 가진 그 멋모르는 친구가 측은하고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는 조금이라도 살아 꿈틀댄다는 그것 자체가 바로 자해 행위이다.

정신 없이 뒷 꽁무니를 빼는 개구리의 뒷 여운을 잘근히 씹어 삼키며 잠시 쓴 미소를 떠올려 보던 그는 짐짓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치켜 흔들었다. 어느 새 하늘의 어둠은 도시의 그것보다 몇 갑절이나 짙어, 논두렁으로 밤이 깊이 자리를 한 후면 하늘과 마을이 하나로 뒤섞여 버렸다. 논 이랑 사이 졸졸졸 물소리나, 가끔 낮게 반짝대는 반딧불이 아니었다면, 마치 허공을 떠 가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후훗,” ‘그 예나 지금이나, 코 끝을 살랑대는 풀바람 내음과 얄밉게 왱왱대는 날벌레의 간지러운 치근거림은 변함이 없어,’ 좁게 기다란 고향길에 여지껏 가져보지 못한 깊은 애정을 느끼며, 발 끝에 와 채이는 풀 뿌리마저도 정겨운 듯 무거운 다리나마 지긋 눌러 밟아보던 최성의 눈 가엔 어느 새 보살이 어리었다. 참으로 각양의 생각으로 이 길을 걸었었지, 문득 뒤를 돌아보던 그는 한 참을 우둑 서버렸다. 이래 저래 현실에 떠밀리어 다니는 동안 기억의 저편으로 재워져 버렸던 세월의 켜들이 한 겹 한 겹 솔솔히 들추어져 일어나면서 발을 묶어 버린 탓이었다.



“잉잉잉, 지가 잘못했어예. 진(긴)총 그런 거 다 필요 없어예,”

아버지의 억센 손에 이끌려 나는 이태 미련으로 징징대며 흙 길을 걷고 있었다. 살 끝을 에어낼 만한 소소리 바람이 불어 대고 있었지만, 이대로 이 길을 들어가면 다시는 서울로 돌아가지 못 할 것만 같은 불안감에 추운 줄도 몰랐다. 꼭 1년 전의 일다. 동리에서도 산 길을 따라 한 참을 올라가야만 집이 있던 나는 이른 아침 한 술을 뜨자마자 부리나케 삽짝을 나섰다. 걸어 걸어 읍까지 나가야만 있던 학교가 일찌감치 겨울 방학에 들어가면서 동래 또래들은 팽이치기며 자치기 따위의 놀이판을 벌였는데, 자칫 늦으면 건달패로 이리 저리 옮겨다녀야 할 판이었디 때문이다. 휭 휭 두 귀를 스치는 바람에 입김마저 하얗게 얼었지만, 그 신나는 놀이판만 생각하면 참을 만 했다. 벼를 다 베어낸 논은 왠지 참 따뜻했다.


“성화 새야, 손등 냈시몬 우리 팬이다.”

늦장을 부린 해가 제일로 높은 하늘에 가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우리는 땀까지 송글 송글 맺혀가며 팽이채를 휘둘렀다. 비틀 비틀 대면서도 용케 다시 서는 놈이 대견하기까지 하다. 동식 엄니 말마따나 사람이나 팽이나 맞아야 정신을 채리는가 보다. 그 덕에 동식이 녀석 볼기짝은 성할 날이 없지만, 그래도 후제 큰 인물 될끼라꼬, 용케 참는다. 동식이 엄니, 우리 숙모는 자식을 서울로 보낼 생각이라칸다. 서울서 공부 많이 해야 높은 사람 된다는데, 우리 아부지는 그란 것도 모르는 갑다. 동식이는 좋겠네, 서울 구경도 하고, ……

내 팽이가 아슬 아슬 누울 준비를 하는 통에 한참을 염소 똥만한 땀을 흘리고 있는데 저쪽 끝에서 동만이 녀석이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야, 야, 도시 사람들이다. 일로 온다, 일로. 우와, 저 구두 좀 보래이, 예까정 눈이 부시네,”

들고 있던 팽이채도 다 팽개치고 우 몰려 갔다. 정말 도시 사람들이네, 아주 가끔 보지만, 그들은 금방 표가 났다. 검정 고무신에 기껏 좋아봐야 하양 고무신 정도 신는 우리 동리 어른들과는 달리, 그들은 끝이 뾰죽하고 빛이 번쩍 번쩍한 구두를 신는다. 거기다 그들은 흙 하나 안 묻고 깨끔 맞은 양복도 입는다.

“얘들아, 최 창열 선생님 댁이 어디지?”

지난 번에 만돌이가 잡았던 토끼 털 같은 옷을 입은 아줌마가 물었다. 야, 아줌마 참말 예쁘네. 여시가 둔갑을 하면 고운 색시가 된다고 웃 골 할무이가 그랬는데, 혹시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구미호가 아닐까? 에이, 설마, 응? 그런데, 최창열이라면, 우리 아부지 이름인데?

그 예쁜이 아줌마와, 함께 온 아저씨들의 손에 이끌려 나는 집으로 향했다. 아줌마의 희다 못해 뽀오얀 손이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부끄러워 혼이 났다. 여시다. 생각한 것이 들킬까봐 흥건 땀까지 흘렀다. 그래도 놀란 송아지 모양 눈을 둥그레 쳐다 보고만 섰는 녀석들의 얼굴을 보자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흠, 흠.

저기만큼 집이 보이자 나는 숨이 턱에 차도록 쌩하니 달려 갔다. 서울서 온 손님이 우리 아부지를 찾는다, 바로 우리 아부지를, ……

“어무니, 어무니, 손님 와예. 아부지, 서울 손님이 아부지 찾아예,”

삽짝이 부서져라 밀치고 마당으로 뛰어들며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아버지가 놀라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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