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잠겨있던 탑골 파고다공원 빗장 열다…4·19까지 이어진 원각사지 곡절의 역사 그 문들이 열어놓을 것들은?

류임현 기자 승인 2024.08.27 15:20 | 최종 수정 2024.08.27 15:40 의견 0

탑골 파고다공원 현재의 정문 '삼일문'

X
탑골공원 북문·동문 개방 행사
서울 종로구(구청장 정문헌)는 지난 23일 탑골공원 북문·동문 개방 행사 '탑골공원, 잠겨있던 빗장을 열다'를 개최했다고 26일 밝혔다. 2024.8.26 [종로구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 종로구(구청장 정문헌)는 지난 23일 2가 탑골공원의 북문·동문도 개방하는 행사 '탑골공원, 잠겨있던 빗장을 열다'를 개최했다고 26일 밝혔다.

이 행사는 3·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탑골공원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조성 당시 공원 모습을 되찾기 위한 '탑골공원 개선 사업'의 하나로 마련됐다.


탑골 공원은 대한제국 고종 광무 원년(1897)에 원각사(圓覺寺) 터에 영국인 고문 브라운의 설계로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으로 건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다.

원래 조선 세조 때 세워진 원각사의 터였고 탑골이라고 불린 것은 최근의 일. 이전에는 탑이 있는 공원이라고 해서 영어식 발음의 파고다 공원으로 불렸다.

원각사지, 팔각정, 앙부일영의 대석(臺石), 13층 탑, 귀부(龜趺) 비석 등이 남아 있다.

정식 명칭은 ‘서울 탑골 공원’.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대규모 저항의 가시적 독립 선언의 가시적 만세 사건인 3·1 운동이 이 곳에서 민족 대표 33인의 독립 선서 및 선언문의 낭독과 같이 시작되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 현재 보존된 모습.

고려시대 이곳에 흥복사(興福寺)라는 사찰이 있었고 조선 태조 때는 조계종의 본사였다 한다.

다만 태조 이방원의 셋 째 세종의 둘째 아들로 형 문종이 죽고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목상 선위 형식을 빌어 즉위하였고 불교에 대한 신앙심을 내세우며 1464년(세조 10) 원각사(圓覺寺)로 개명하고 중건했다.

또한 세조는 단종의 측근이 된 김종서 등도 주살하고 신숙주 등과 같이 두만강 유역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토관제도를 실시하여 고려 때도 트여 있던 무역 관문 한 개를 막고 조선 왕조 국경의 선을 그었다.

(앞 서 여진족들이 잔존해 있던 그 관문에 4군과 6진을 군립한 것은 세종 임금이었다. 조선 또한 더 앞 서 발해를 멸망시킨 여진족에 대한 유화한 회유책은 없었다.)

원각사는 근처 가옥 200여 호까지 철거하며 3년 후 완공된 이 사찰의 규모는 굉장한 것이었고 도성 내 대가람(大伽藍)이었다고 한다.

▷대가람 : 가치가 높거나 규모가 큰 절을 이른다.

당시 절은 당우나 문루 규모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특히 전국에서 동 5만 근을 모아 주조시킨 대종이 자리했고 1468년 완성된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그 안에 샤ㅎ카족 싯타르타 왕자가 열반에 오른 니르바나 불(佛)을 칭하는 석가여래의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이 안치되었다.

공원 내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국보 제2호, 대원각사비는 보물 제3호, 독립 선언문의 낭독으로 독립운동의 봉화에 불을 당겼던 탑골 공원의 팔각정은 서울 시도유형문화재 제73호 등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공원 내에는 현재 3·1운동 기념탑, 3·1운동 벽화, 의암 손병희 선생 동상, 한용운 선생 기념비 등이 있다

갓 조성된 이후 탑골공원의 모습.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팔각정이 보존 되었고 이후 그 옆으로 서양식 음악당 등이 추가 건립되었다.

현존하는 대한민국 국보지정 석탑 가운데 가장 후대에 속하는 것이 된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그 형태와 평면이 특수하며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수법이 세련되고 화려해 조선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도 손꼽힌다.

원각사지 대원각사사비는 갑골 등짝으로 비석을 올리고 쌍의 용문을 세운 용각비다.

원각사지 대원각사사비.

원각사지 10층 석탑의 보존을 위하여 유리 차단 둘레가 쳐졌고 그 곁의 옥타곤의 '팔각정'이 그대로 위치해 있다.

1959년 삼일절 기념식이 거행된 당시의 팔각정.

해방 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도 설치 되었으나, 미 군정 아래 상하 좌우 할 것 없이 일제 친일 행각으로 귀족 칭호와도 같이 강제력에 의한 집적된 부를 축재한 조선 이씨 왕족의 친족들 및 친일 세력의 잔당들과도 결탁된 상권 세력들의 재벌화 및 축재화까지 비호하며 자유당 독재를 지속하는 것에 분노한 군중들이 1960년 4·19 혁명의 발발로 몰려가 성난 민중들과도 같이 강제 철거하였다.

그 날 성난 군중들이 탑골 공원의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을 강제 철거한 그 뒷 날 이승만 전 대통령은 급기야 하야를 발표했다.

해방 뒤 이승만 동상이 설치 되었으나 1960년 4월 4·19 혁명 당시 성난 군중들이 몰려가 강제 철거했다.
그 뒷 날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했다.

이 번 재개방 결정에 대하여 구 관계자는 "북문과 동문이 장기간 폐쇄되면서 공원 내외부가 단절되고, 인사동·익선동과도 단절되게 됐다"면서 "탑골공원의 안팎을 연결하고 모든 시민에게 열린 공원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이번 개방을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설대출 뉴라이트 세력까지 연계된 종로구 전주 세력들까지 같이 뭘 열고 뭘 어떻게 활용해 보겠다는 것인지 막연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을 새로 세워 올릴 계획은 아직 발표된 적은 없다.

행사는 정문헌 종로구청장과 이종찬 탑골공원 성역화 범국민추진위원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문 개방과 북문 화단 꽃 심기, 발굴 현장 순회 순으로 치러졌다.

정 구청장은 "기존에 열려있던 서문과 삼일문에 북문, 동문까지 더해 탑골공원 4개 문이 모두 개방되고 공원 안과 밖이 이어지게 됐다"라며 "탑골공원이 전 세대를 아우르며 모든 시민에게 열린 공간으로 거듭나는 시발점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현직 완장을 찬 공관직들의 그 미래야 무엇이든, 세조 임금이 세운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독립 선언문이 낭독된 팔각정을 보존하고 있는 탑골 파고다 공원이 어떤 문을 열게 될 지에 대하여야 귀추가 주목되지 않을 수는 없다.

일제시대 이씨 왕조 친족 및 국적 논란등 정치권 관련기사 링크

http://sharimanzu.today/View.aspx?No=3346068

http://sharimanzu.today/View.aspx?No=3334760

저작권자 ⓒ 믜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