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이라는 훌륭한 이름과 제가 문학상이라는 인연으로 연결된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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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 시인 [지용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제37회 정지용문학상에 허연(59) 시인의 시 '작약과 공터'가 선정됐다고 지용회가 15일 밝혔다.

수상작 '작약과 공터'는 공터에 피어난 작약과 그 안에서 발견되는 생명의 모습을 독창적인 시어로 표현했다.

"진저리가 날 만큼 /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 작약은 피었다 // 갈비집 뒤편 숨은 공터 / 죽은 참새 사체 옆 // 나는 살아서 작약을 본다 // (중략) // 작약은 / 울먹거림 / 알아듣기 힘들지만 정확한 말"(시 '작약과 공터' 에서)

심사위원장인 이근배 시인(대한민국예술원 회원·전 원장)은 수상작에 대해 "'진저리가 날 만큼'으로 첫 글을 떼는 까닭이 '작약은 피었다' 한 행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흘려버릴 수 있는 공간에서 '알아듣기 힘들지만 정확한 말'을 찾아서 작약과 나의 관계를 그 깊은 생성과 소멸을 고요 속에 함몰시키면서 마침내 살아있음의 눈부신 실존을 발견해낸다"고 해석했다.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허연 시인은 1995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를 발간했고, 이후 '내가 원하는 천사',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오십 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등의 시집을 펴냈다.

현대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시작작품상, 한국출판학술상, 김종철문학상, 한국출판평론상 등을 받았다.

허연 시인은 "정지용이라는 훌륭한 이름과 제가 문학상이라는 인연으로 연결된 오늘을 잊지 못할 것 같다"며 "그것이 어떤 계시인지 어떤 의미인지 시를 쓰는 인생 내내 되새기고 또 되새기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1989년 시작한 정지용문학상은 매년 뛰어난 시 한 편을 선정해 수여한다. 정지용(1902∼1950) 시인의 고향인 충북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이 공동 주최하고 문인들로 구성된 지용회가 주관한다.

상금은 2천만원이며, 시상식은 5월 17일 정지용 생가와 옥천 구읍 일원에서 제38회 지용제와 함께 진행된다.

허연

출생 1966년 8월 8일

학력 연세대학교 석사, 추계예술대학교 박사

경력 매일경제신문사 취재기자, 문화부장, 문화선임기자, 매경출판 대표, 일본 게이오대학 연구원

직업 시인, 언론인

「교각 음화」

어린 시절.
큰물이 쓸려 간 아침,
교각 밑에 살던 거지 소녀가 떠내려갔을까 봐
숨도 안 쉬고 달려갔던 교각
마음 졸이며 달려갔던,
그 슬픈 음화가 생각났다.

병에 걸린 걸까.
엉겨붙은 눈꼽에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고양이들이
짝짓기를 한다.
세상에 다시 오지 않을 거니까
적어도 그것만은 알고 있으니까
공룡뼈 같은 교각 아래서
고양이들은 생을 불태운다.

교각 밑을 걷다 보면
모든 것이 이상하게 음화淫畫로 바뀐다
녹물이 눈물처럼 흘러내린 교각에는
설익은 유서들이 있고
누군가의 투항이 있고
어린 나이에 생을 마친 친구들과
그을린 맹세들이 있다.

스프레이로 쓴 억지스러운 구호 몇 개가
중년의 날 위협하고
이따금씩 덜컹대는 상판에서는
콘크리트 가루가 축복처럼 쏟아졌다.

트랙처럼 뻗어 있는 한강 다리 밑에 숨겨놓은
그 비밀스러운 음화를 지울 수가 없다.
내가 음화였음을.

「무반주」 (일부분)

행복하냐고 물을 때마다
바닥에 침을 뱉는

골 깊은 얼굴들
재개봉관에서 나와
수줍은 밥집에 모여
백반을 먹고

밤이 오면
금이 간 보안등 아래
어깨 없는 아이들이
그림자놀이를 한다

[……]

자정이 되면
다행스럽게
그날의 신神이 태어나고

종주먹을 쥔 아이들은
한 손에 빵을 들고 코피를 닦는다

이곳에서 희망은
목발을 짚고 집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