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는 비도 잦습니다. 이러다 우기와 건기를 반복하는 사바나 끌리마로 변형 되면 어쩌냐고, 자칫 사자가 뛰어 다니겠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옛날에 가장 무서웠던 것은 호환 마마 였었는데 말씀입니다.
기자는 본래 모든 쟝르를 아우르는 문학가가 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평론도 쓰고, 기사도 쓰고, 리뷰도 쓰고, 서사도 쓰고, 서사? 아무튼 연구 또한 결국 문학가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세월이 가장 길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Weekly concentra DaL 믜디일보의 제호 중 그 DaL의 뜻에 대하여, 아직 소개글을 작성해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먼저 그 의미부터 간략하게 기재를 해두자면,
Denunciation and Lɑboratory 혹은 Denunciation and Law.; 고발과 연구소 혹은 고발과 법.
먼저 고발의 사전적 의미를 기재하자면, (위키백과 인용)
고발(告發)은 고소권자와 범인 이외의 사람이 수사기관에 대해서 범죄사실을 신고하여 그 소추를 구하는 의사표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즉 고소와는 달리 고소권자 이외의 제3자가 행하는 것을 말한다. 고발은 고소와 달리 누구든지 범죄가 있다고 판단되는 때에는 고발할 수 있으며, 공무원은 그 직무를 행함에 있어 죄가 있다고 사료하는 때에는 고발하여야 한다. 그러나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은 고발하지 못한다. 고발은 일반적으로 수사를 촉구하는 것에 불과하나 관세법 또는 조세범처벌법 위반의 경우처럼 특정한 범죄에 대하여는 소송조건이 될 수도 있다.
즉, 연구 언론법인 샤리만수의 언론법인 샤리만수는 DaLaw까지를 좀 더 이뤄내 보고 싶다는 염원 아래, 이뤄내야만 되겠다는 사명감과 절실이, 어쩌면 해내야 되는 일은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방법들 가운데 결사로 선택한 한 가지의 방법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해낼 수 있는 일은 해내만 되는 일이다 라는 결사가 더 타당할까요?
사실 기자는 꽤나 많은 고뇌들을 "연구"라는 용어 아래에서도 엮어내 보려 꽤나 많은 글들을 써왔었으며, 꽤나 적지 않은 책들을 읽었으며, 꽤나 많은 것들을 보았으며, 꽤나 편수 되는 시들을, 소설들을, 그리고 연구 논문들을 써왔으며, 어쩌면 저장 창고라는 이름 아래 꽤나 더 많은 저장을 달성해 두어 왔던 과정 같이도 요약되는 지나온 세월이 되어 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요동, 만주와 간도, 더 넘어의 대륙도 넘나들던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는 납북이라 부르든 월북이라 부르든 그 곳에 가버려진 분들에 대한 관심은, 자의로든 타의로든 흡사 눈만 조금만 들어 떠보아도 수 많은 딱지처럼 들어찬 달동네들을 볼 수 있던 시절, 더는 5일 장은 도시에서 사라져 가는 공터들의 소식을 들으며 엄마와 손을 잡고 가까운 시장을 따라 다니던 유년의 시절, 시내에서 시내를 나가면 있던 광복동과 국제시장이 왜 깡통골목인가를 몰랐던 시절, 초량을 걸어 서면까지의 거리를 로타리 클럽으로 알았던 시절, 그곳들과 그 곳의 더 넘어의 곳들에 대하여, 후반기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남은 꽤나 많은 날들과 목도의 순간들과 고뇌의 글들과 또, 이렇게 기자는 번번히 순서가 바뀌는 경험을 많이 하기는 하는 사람인 모양입니다. 그곳들과 그 곳 더 너머의 곳들을 위하여 저는 남은 꽤나 많은 날들과 고뇌들과 또 글들에 대하여 다다라 도DaL 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표현하는 자와 표현되는 자, 저작가와 주인공이 일치될 수도 있으며, 그러나 전적으로 일치되지 않을 수도 있는 넓고 깊은 스펙트럼은, 결코 소설에서만이 아니라는 저의 이론의 어떤 부분들도, 시라는 정의의 역사는 그 과정으로서 같고도 더 다를 수 있겠으나, 저는 여전히 고소와 고발의 차이보다 어느 순간들 그 차이의 스펙트럼에 대하여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퍼소나이기도 하여, 인성론과 시에서의 시는 시론에 더 가까운 용어라는 등의 논문도 써내 보려 했었듯 시론도 여전히 위대한 인생의 사명을 위한다는 그럴싸한 구실들과도 같이 아래의 시 두 편을 첨부합니다.
참고로 기자는, 기자의 등단 여부에 대한 논점의 논쟁화를 바라지 않는답니다. "등단"의 의미를 계속 고민하다가 저희 믜디일보도 신춘문예를 대대적으로 꾸려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 가능한 네트워크와 가능한 자본들에 대한 고민도 잠깐 더 보태어 보았습니다.
그런 덧붙임은 어떨까요? 기자가 처음 지하철의 안전문에 걸린 시들을 읽었을 때, 스크린 도어에 바짝 가까이 서서, 언제나 열차가 오나 하는 냥 굴러보던 동동 대던 발길도 멈추고, "아빠", "엄마", "우리", 그런 단어들이 가장 큰 "울림"이 있다고 크게 "웃었"답니다.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
(저작권자 저작가)
성격은 날씨와 거울 놀이를 한다.
오른 손을 내밀면 왼 손을 내밀어라,
닮은 꼴 놀이를 한다.
비가 잔뜩 내렸다 그치면
꼭 네 성격 같네 하였다, 날씨가.
맑은 하늘로 편지를 보내는 날에는
엄마, 지구는 장마만 계속 되고 있나 봐요.
비가 비가 많이도 온답니다.
그런데, 비는 곧 그친답니다.
오른 손을 내밀고 악수를 합니다.
누구나 맑은 날은 손들을 꼭 잡고 기분이 좋게 마련이니까요.
성격은 날씨와 손잡기 놀이를 합니다.
악수도 기분 좋은 맑은 날이기를 바란 답니다.
우리의 날들에게도 맑은 비가 주룩 주룩 내리는 날들만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성질은 그 때도 그 때에도
날씨 놀이로 많이 자랐던 것도 틀림 없었거든요.
날씨는 꼭 내
성질머리도 같았답니다.
마음은 트로피ㄱ
(저작권자 저작가)
네가 소심해서 따를 당하는 거야,
라고 너는 나에게 말하였다.
좀 더 당당해지라니까?
네가 당당하지 못할 것은 없다니까?
바깥은 날씨도 이렇게나 좋은 데.
누구에게나 공평한 저 푸른 하늘을 보라지.
성질없는 애가 어딨다고.
어깨를 당당히 펴고, 간단하게, 씩씩하게 걸어 본다면,
성격은 갓 말려 온 여름날 티- 셔츠와 같아서
날씨 따라 좀, 그런 것 뿐이겠지요.
펴려고 해도 펴려고 해도
뚝 뚝 떨궜던 만큼 울게 된답니다.
쭉 쭉 펴려고 해도, 펴려고 해도,
다 날씨 탓이랍니다. 성질 없는 애가 어딨다고.
성격은 이렇게나 커진답니다. 날씨를 모두
담을 만큼 늘어 나려나 보다고,
아직 어려서, 아직 젊어서, 날씨 따라 잠깐 쭈글했던 것 뿐이겠지요.
넉넉히 후줄한 것 뿐이겠지요.
수루메 같은 넌, 내 티- 셔츠 같은 오징어,
빛나는 태양 아래로
저렇게나 멀리 펄럭이네요.
당당하게도 성질머리 없었던 애가 어디 있다고.
말짱한 티- 셔츠만큼 빛나는 하얀색 태양.
내려받기가 허락된 사진. (찍은 이 불명. 일명 떠도는 사진.)
류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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