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위치(Greenwich). 홀 나란히 하늘의 별을 보는가.

에스뜨레야 해묵은 내일 태양의 사이드. 전통이냐 학대냐.

류임현 기자 승인 2023.09.11 23:43 | 최종 수정 2023.09.12 00:43 의견 0

스페인 투우.


지난 20일 스페인의 우승으로 끝난 여자 월드컵 시상식에서 스페인 축구협회회장의 헤니페르 에르모소 선수에 대한 포옹과 (강제) 키스로 촉발된 반발로 연일 소요가 빗발치고 결국 회장이 사퇴하기에 이르는, 결코 작지만은 않은 사건이 있었다. 어느 국가나 대체로 스포츠계의 마초 문화는 악명이 높아 왔지만 특히 사회 전반으로 마초주의적 남성주의가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스페인에서의 스포츠계의 관행들은 글로벌의 "일반"적 만연한 악명들을 가뿐히 도를 넘어 흡사 전통적 문화인냥 근절되지 않는 “당연”처럼 여겨져 왔었다는 징후와 증세들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스페인은 여전히 왕조의 왕실이 존립하고 있는 국가다. 선대 국왕이 중동의 국가로 망명에 이르는 일련의 사태(?)들을 겪었던 스페인에서 현직 축구협회의 회장이 사직서와 같이 유럽축구연맹(UEFA)의 그 부회장의 자리도 물러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은 한 마디로 역사적 “기억의 도전”이다.

유럽 사회에서 축구 특히 월드컵이 갖는 의미와 그 팬들에게서 차지하는 “현장”의 "광란란격발"의 메모리들을 알고 있다면, 우승의 현장에서 그 시상식의 감격에 이기다 못해 옆 자리의 선수를 포옹하고 키스를 했다는 광경쯤은, 투우 축제의 현장에서 광란하는 그들 또한 알고 있다면 오히려 외부 사람들이 더 의아할 만한 사건인 것이다. 쉽게 마무리를 짓는 수준들로 “너무 감격에 겨워서” “잠깐 실수를 한 것을” “사과합니다.” 쯤이면 끝날 수 있을 것도 같은 사건에 대한 양 측의 반응은, 과히 신경질적 히스테리를 넘은 한 사회적 이정표격의 “광경”들까지를 연출해 내고 만 것이기 때문이다.

고문은 문화가 아니다. 투우가 스페인 다운 전통유산의 것인가? 싫다. 라고 말하라.

비록 포옹과 (강제) 키스에 이른 장면이기는 하나 그 쯤으로 그렇게까지 단체로 떼거지로 뛰쳐 나와 시위와 난동까지를 부릴 만한 일인가? 라고 일부 여성들의 시위와 난동쯤으로 결국 협회의 회장이 사직서와 같이 국제기구의 부회장 자리까지를 물러나야만 될 일인가? 라는 양 측의 촉각과 신경전은 이미 서구 사회에서는 일반화 되어 왔던 포옹과 키스의 선을 오히려 넘은 대치가 되고 있는 것이다.

1675년 영국 국왕 찰스2세에 의해 런던 교외 그린위치에 설립된 영국 왕립천문대.


10일(현지시간) 영국 캠브리지의 거튼 컬리지 등에 따르면 국제천문학연맹(IAU)은 카탈리나천체탐사(CSS) 및 영국천문학협회(BAA)와도 같이 2개의 소행성의 이름으로 애니 S.D. 몬더 (Annie Scott Dill Maunder)와 앨리스 애버렛(Alice Everett) 두 학자의 이름을 붙여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가디언지의 한 옵저버는 드디어 밤 하늘은 두 “여성”의 이름을 딴 행성을 포함하게 될 것이라며 감격을 표했다.

19세기 영국에서 활약한 두 과학자의 앞 서거니 뒤 서거니 뛰어난 업적과 기여도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모호한" 정체성의 "애매한" 존재들로 스러져갔던 두 천문학자들에 대한 평가의 시도는, 비범한 일을 한 비범한 여성들도 하늘 위에서(나마) 한 자리들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재평가를 받기까지 한 세기가 더 넘는 과정이 필요했다는 사실 앞에 더 방점을 두게 만드는 콘템포로리(contemporary)한 시사점인 것이다.

캠브리지의 거튼 컬리지에서 수학을 공부하면서 친구가 되었던 두 사람은 영국천문학협회(BAA)의 초기 멤버들이었고 우등으로 시험들을 통과했지만 학위조차 받을 수 없었던, 여전히 “여학생”들로 남아 있던 대표적인 두 짝꿍이었다. 천문학은 단순히 여성은 최고가 될 수는 없다고 여겨지던 영역이 아닌, 천문학은 여성은 해낼 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던 대표적인 영역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극도의 박봉 아래 수 많은 별들의 도표들을 완성해 갔지만 결국 우주에 대한 그들의 관찰과 연구는 남성 동료들의 공으로 돌아 갈 것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과학적 성과들은 “여성”이 “설마”라는 편견이 만연한 사회에서 인정은 커녕 남성들의 성과물 아래 “간과”와도 같이 모호한 존재들로 치부되는 가운데 죽어 갔던 다른 여성 과학자들과도 다를 바 없이 그렇게 죽어 갈 것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수학에서 단연 돋보이는 성적을 획득 해도 여전히 사회는 “lady computers”는 왕립 천문대에서 직장을 구할 수는 있는, 그러나 손 쉽게 얻어지는 값 싼 포지션들로나 여겨질 뿐이었으며, 캠-브리지, 옥스-브리지를 커밍 아웃하는 “수학에 재능이 있는” 풀 속의 여성들로만 알려졌던 것이다.

대학의 펠로시절 애니.
대학의 펠로시절 앨리스.

몬더는 그리니치에서 관찰한 가장 큰 태양의 흑점을 발견한 뒤 그녀보다 17살이 더 많은, 이미 다섯 아이의 홀아버지였던 상관 에드워드 월터 몬더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실상 그 때부터 몬더 여사가 된 그녀는 그녀의 지위(post)를 사임하도록 본격적으로 강요를 받았다. 남편의 조수로 자원하는 식으로만 계속 연구를 할 수 있었고, 그와 같이 탐사를 다니던 중에야 성공적으로 토탈 이클립스의 사진을 담아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힘든 성과였다는 사실은 후대가 감동으로 인정을 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녀는 타고난 천문학자이자, 태양의 사진작가였다.”

이후 몬더는 그녀의 남편과 같이 태양의 흑점을 분석하기 위한 “butterfly diagram”을 창안해 냈는데 현재도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그 성과에서도 그녀는 공동저자로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었다. 그녀의 남편은 인기리에 팔린 한 천문학 공동저서의 서문에서 “영광스러운 그 (그녀의) 원서가 없었다면 그의 ‘인생 성과’는 가능하지가 않았다“고 그나마 인정한 것이 전부다.

1916년까지도 남성만 왕립 천문학계의 회원으로 허가되고 있었고 그녀는 태양흑점의 비대칭적 속성에 대한 발견 시에도 그녀로서는 허락 되어 있지 않던 그 학술 논쟁들을 남편이 대신 해내도록 해야만 했었다. 과학논문은 발간할 수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모교인 거튼 컬리지에서 지원을 좀 받자 덜컥 카메라를 사버린 사람이었고 그 카메라로 1898년 당시 발견된 평균들과는 비교 되지도 않는 최장 1천만㎞까지 뻗어나간 태양풍류의 증거까지도 포착해 낸 사람이었던 것이다.

애니 스코트 딜 몬더 (Annie Scott Dill Maunder) She was an Irish-British astronomer.

그런 그녀와는 달리 앨리스 애버렛은 한 해에도 2만2천개의 별들의 포지셔닝을 관찰하고 연산하면서 별의 궤도들에 대한 두 개의 논문을 발간하면서도 그녀 자신은 그녀 자신이 지원 가능한 천문학자로 명실공히 홀로 서내 보겠다며 고군분투한 여성이었다. 사실 그녀에게는 큰 천문대가 직위를 제공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남성도 아닌 여성에게 어떻게 낭만 문학도 아닌 과학적, 이성적 실재로서의 천문(학)을 연구 관찰하게 할 수가 있겠느냐는, 여성에 대하여는 그 가능성에 대한 어떤 데이터나 연구 결과도 ”없고“ “가능하지가 않다”로 결론지어져 있던 당대의 “데이터”들을 이유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앨리스 애버렛(Alice Everett). 그녀는 아일랜드에서 자랐다고 한다. 애버렛은 그린위치 왕립천문대에서 천문학자로 일하며 처음으로 직봉을 받은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Everett is best known for being the first woman to be paid for astronomical work at the Royal Observatory, Greenwich, when she began her employment at the observatory January 1890.)


35세에 그녀는 광학 관련 영역의 일들을 시작했고 1903년에는 드디어 실로 런던물리학회(PSL) 저널에 논문을 발표한 첫 번째 여성이 되었다. 1925년에 은퇴하기 전까지 물리학자로서 국립물리학연구소(NPL)의 두 번째 경력을 시작하여, 나이 60세에는 전기공학자로서의 세 번째 경력에까지 뛰어 들었다. 기계식 TV를 처음 선보인 영국의 기술자 베어드(John L. Baird)와도 같이 작업하면서 결국 TV 광학과 관련된 공동 특허까지도 이루어내는 여성이 되었는데, 사실상 그 사실부터가 1926년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TV 이미지 출연"과 맞먹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BAA의 프로스트 회장은 말한다. “그녀는 초기 TV 기술공학의 선구자였으며, 왕립 TV회의 창립 멤버였습니다.”라고.

더하여 모교의 닥터 엘리자베스 켄달 여사는 강조한다. “거튼 컬리지의 빅토리안(세대)의 여성들은 두려움이 없는 개척적인 분들이었습니다. 함께 공동으로 어울려 서로가 서로의 지지가 되며 빛나는 ‘튀는’ 성과들의 그 역할자들이 된 것입니다. 공동체적 의식, 감히 여러분들은 현재 단체에 참가하여 여러분 자신들의 학문적, 학업적 게임의 그 탑의 반열 위로 올려 놓으려 한 것만으로도 이미 무엇인가를 이루어낸 사람들인 것입니다.”라고.

수 많은 여성들이 그들의 나아갈 바 그녀들의 잠재력 또한 실현해 내기 위하여 밤낮도 없이 싸워내야만 했으나 전통적으로 또는 필수적으로도 대체로 남성들의 영역에서 “최초” 혹은 "최고"라는 명성을 깰 수 있는 준비된 여성들은, 그들은 한 가지 더 "최고의 남성들보다 더 뛰어나야만 한다"는 사실 또한 너무도 지나치게 잘알고 있는 여성들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두 명의 여성 천문학자의 이름이 하늘 위 직위 위에 포함되게 된 것은 비단 과거를 바로 잡는 정의의 차원만이 아닌, 바로 그 미래를 일깨우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미래를 일깨우기 위한 것. 천문학도가 아니어도 대부분은 알고 있는 그 진리를, 과거와 현재가 바뀌지 않으면 미래가 바뀔 가능성은, 바뀌지 않을 가능성은 “반드시 더 크다”는 그 진리 말씀이다.

Annie Scott Dill Maunder 및 Alice Everett. 하늘 위에서 나란히 짝꿍으로 빛나고 있는 두 여성의 고향은 그러나 두 여성의 이름과 두 여성이 입고 있는 각 자의 옷들만큼은 더 멀리 다르다.

과연 어떤 미래를 일깨우기 위하여 현재의 우리들은 빛나게 같이 튀고 있는지를, 그 포지셔닝들만큼으로 바로 잡을 과거도 바로 잡을 미래도 바로 현재에 있다는 뜻이다. 바로 잡을 과거와 바로 잡을 미래의 바로 잡을 그 현재에.

류임현 기자

저작권자 ⓒ 믜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