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공영방송이 택한 주제에 대한 "전지적 참견"...대하사극 5%대 시청률

류임현 기자 승인 2023.11.12 14:19 | 최종 수정 2023.11.13 02:06 의견 0

'고려거란전쟁' 공영방송이 택한 주제에 대한 "전지적 참견"...대하사극 5%대 시청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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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려거란전쟁' [KBS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여요전쟁을 배경으로 한 김동준, 최수종 주연의 대하사극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시청률 조사에서 5%대를 기록했다.

첫 방송은 거란(요나라)과 고려의 전투 장면으로 시작했다. 고려군이 바퀴가 달린 거대한 방패 역할을 하는 '검차'를 이용해 방어선을 구축하고 거란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는 모습이 담겼다.

진주(금주) 강씨 강감찬 임시직 상원수대장군, 양규 지방 임시 판견직책 도순검사의 대거란 전쟁 활약상 등이 주로 다뤄질 예정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씬으로는 고려 황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목종은 동성 유행간(庾行簡)에 빠져 국사를 등안시 했고 자녀도 없는 상태로 다음번 태자 문제로 암투가 전개되는 대목이다.

역사적으로도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 목종의 동성애를 과감하게 표현하고 기존의 대하사극보다 대사도 가벼운 편이다. 공영방송 사극인 까닭으로 역사 고증의 차원에 대하여 좀 더 비판적 시각이 요구된다면, TV 방송사극이 갖는 "볼 거리" "흥행몰이" 수준에서 좌지우지 될 것이라는 예상도 피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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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려거란전쟁' [KBS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고려거란전쟁'은 첫 전투 장면에서 웅장한 규모와 세련된 카메라 움직임이 눈길을 끌었다. 검차 아래로 침투해 공격하는 거란군 병사의 시선을 1인칭 카메라에 담는 등 교차시선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단지 카메라 워크에 그치는 시선 처리 등 대중극적 영역의 한계 내에서 심지어 역사 이해 부족이나 잘못된 역사 이해의 흥미거리로 전락될 수 있어 우려를 감추기는 힘들다.

거란은 고려초 왕건 태조 건국 시기까지만 해도 거래나 수도승 교환도 쉽게 이루어지던 종족으로 혈족 일파 주장까지 있어 왔다. 거란이 중원에서 한인(漢人)들 민심을 포섭하기 위해 한반도의 왕건 고려 건국과의 특약 거래를 거절한 뒤로 태조가 거란이 보낸 낙타를 굶겨 죽이는 등, 각자 오히려 다른 중원결탁의 길로 나가지 않았다면 세계사가 바뀔 수도 있는 종족이었던 것이다.

거란어로 키둔(/*qid ún/) 또는 키디(/*qid i/), 키타이(/*kʰitai/) 또는 키탄(/*kʰitan/)으로 변형된 거란은 각각 중국어와 몽골어를 통해 치단(契丹, Qìdān)과 키단(Кидан)으로 전사되었는데,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에서 북중국을 가리켜 카타이(Catai), 남중국을 '만지'(Mangi, 蠻子)라고 되어 있다. 이 '키타이' 또는 '카타이', '키탄'의 어휘 뜻으로 "날선" 칼, 칼날, 날붙이들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설에 따르자면 거란의 국호는 "날"세운 부족이 되는 셈이다.

요나라를 세우고 중원 만주 일대를 아우르며 한족인 조씨가 왕으로 나선 송나라까지 누르게 된 거란족은 이후 수 차례에 걸쳐 고려에 침입을 단행했다.

뜻은 간단했다. 먼저 993년 요나라(거란) 성종은 송나라와 고려 사이의 친선 관계를 차단하려 했고, 또한 고구려의 옛 영토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한 것이다.

사실상 서희가 이뤄낸 담판 또한 요의 침략 이유만큼 담판이 가능했던 이유 또한 간단했다. 옛 영토 주장 소손녕(蕭遜寧)에게 서희(徐熙) 또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으니 요의 땅도 오히려 다 고려 땅이라고 주장한 것이고, 요나라가 압록강 동쪽 여진도 내쫓고 옛 땅을 돌려달라고 한 것이다. 그 말에 설득된 소손녕이 물러간 것이고, 고려는 서희의 그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 되찾게 된 것이다.

송나라와 관계도를 이어가려한 왕씨에 대하여 승승장구하던 요나라에 숫제 항복하자는 중신들도 많았다. 물론 그에 강력히 반대한 자가 강감찬, 양규 등이었던 것.

여진은 물론 발해까지 멸망시킨 요나라는 주로 소씨들을 내세워 대군을 이끌고 누차에 걸쳐 고려를 침략 했는데, 매복과 치수에 능한 고려 장수들이 강감찬 등을 중심으로 매 번 승리를 이끌어 냈던 것이고 결정적으로 귀주(龜州)에서 대첩 당시 협공으로 대승을 거둔 이후 요나라가 화평국교 협약 요청에 이른 것이다.

고려는 이후 여진(만주족) 금나라에 이은 몽골 원나라가 중원을 휩쓸기 전까지는 요나라에 양립하여 왕씨 왕조로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이고, 결국 명나라가 국운을 세울 때 오히려 조선 왕조에 왕조의 성씨 자리를 내주게 된 것이다.

요나라(거란)가 침략하거나 요구가 있을 때마다 고려 왕씨는 번번히 앞 서 중원 등지 한족(漢族) 포섭을 이유로 삼았던 거란을 힐난하거나 발해를 멸망하게 한 것 등을 이유로 삼아 대적한 것이고 보면 아이러닉한 결과다.

이번 공영 방송의 '고려거란전쟁'이 고려, 꼬레(아)의 제2 수도로 불린 평양에 이르는 외교 및 무역의 동북아는 물론 서역을 넘어 글로벌 전역에 이르는 실상 및 실세 역동에 대하여 얼마나 통찰하고 접근하고 있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거란은 일찌기 신장 위구르를 경계로 쓰촨, 티베트 불교에도 같이 정체성을 두고 수도승 왕래에도 뜻을 두었던 종족이었고, 먼저 언어 차원에서 "한자어" 방정식 차이들에 대한 또 다른 스펙트럼을 이룰 수 밖에 없는 유목 끼탄(契丹)의 "세운 날" 족인 셈이다.

이해를 돕자면, 앞 서 후삼국기 수도승 교역도 잦았던 샤카(사타) 돌곽의 석경당이 왕건의 거란 제거론 밀서에도 결국 거란을 더 지지했고 이후 석경당이 후진을 세우는데 도움을 준 거란에 대하여, 고려와의 혈족 관계도를 굳이 따져 보자면, 흡사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이 신라이듯, 여진과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오히려 한족(漢族)과는 다른 고(구)려에 더 정체성을 둔 계열 종족이라는 뜻이다. 물론 "고구려"인들에게 한족(漢族)이라는 정체성은 전혀 찾기 힘들 것이다.

(말과 문자, 종족, 및 국가에 대한 정체성은 한반도 삼국의 사투리 예에서도 알 수 있듯 결코 사투리 즉 말만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나, 최근년 약 (수)만년 인류 역사에 있어 말과 문자, 그리고 풍속과 종족 및 민족적 전개에 대한 이해는, 인류 문명 전개 및 언어 인종의 근간에 대한 기본적 고찰을 다루는 다른 글들, 기사들에서 좀 더 심층적으로 다룰 것이므로 참고바란다.)

발해 멸망 이후 세력을 모으고 요나라에 대적한 여진이 초기 송과 연립으로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킨 뒤, 점차 조씨 왕조 송나라를 강남 아래로 밀어낸 당시 지도.
몽골 원나라의 중원 전역 장악 이후 명나라 융성기에도 여진 만주족(멘츄리안) 금은 몽골 아래 세력을 키웠고 이후 청나라를 세우고 누차 중국 전역의 전제 왕조를 세우기에 이른다.

한편, 같은 날 오후 9시 50분 방송의 남궁민 주연 MBC 퓨전사극 '연인'은 11.6%의 시청률을 기록해 동시간대 드라마 가운데 가장 높았으며, 오후 9시 20분에 방송해 '고려거란전쟁'과 시간이 가장 많이 겹치는 tvN 등 시청률은 그 직전 회차보다 낮아져 여기에서 갈린 듯도 보인다.

오후 10시에 방송한 SBS '7인의 탈출'도 5.2%의 시청률로 SBS 자체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확인된다.

역대 대하사극 최고 시청률은 같은 공영방송 KBS <태조 왕건> 60.2%, <용의 눈물> 49.6%에 이른 수치를 들 수 있다. 대중 방송 영역에 종사자가 아닌 자들도 한 번쯤은 방송이 사극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 수치였다.

이번 '고려거란전쟁' 주제에 대한 공영방송의 주제 선택이나 의지에 대하여는 시청률 수치가 아닌, 그와는 전혀 다른 "전지적 참견"의 뜻에서 한 번은 두고 볼 만한 일인 것이다.

류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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