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단의 옥타곤 연꽃모양 받침, 연꽃모양탑 석가여래 형상, 꼭대기 갓.
불상 뒷면 "불도락세", 경인년 4월 28일, "리야모립" 한자 새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16일 북한에서 고려시대 옥불상이 처음으로 발굴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고려시대의 수도 개성에서 발굴된 이 옥불상은 높이 10.8cm, 무게 425g으로 3단의 8각형 옥타곤 기단과 연꽃을 형상한 탑모양 위에 석가여래가 앉아 있는 모습이 섬세하게 형상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불상의 뒤면에는 "불도락세", 경인년 4월 28일, "리야모(소 울음 소리 모)립"이라는 글이 한자로 씌여져있다.
옥타곤 팔각형과 연등을 기초로 하는 삼국시대 제의로는 신라 진흥왕 때 불교의 팔관재계를 지키기 위해 개최한 팔관회(八關會) 및 연등회가 있는데, 옥타(곤) 문화의 팔관제의는 신라시대보다 훨씬 더 상대부터 전해져 오던 관례재이다.
기자는 최소 두 개 씨족 혹은 부족적 트기 결합을 이루(려)는 관례(도)가 발생하는 초기 인류시대부터 이어져 온 신앙과 언어인종적 관례적 흔적의 토속신앙과 (아리안) 불교까지가 내포되는 잔류로 보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팔관회가 고구려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이어진 "불교 의식"과 같이 산천 용신제나 10월 제천행사 등 토속적 신앙들을 결속시킨 결과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 경주 김씨 후손으로도 알려진 궁예 또한 태봉을 세우기 전에는 죽은 병사들 넋을 기리기 위해 팔관회를 개최했다고도 한다. 성격이 다소 난폭하거나 신경성 병후가 있던 것으로도 추정되는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이 고려를 개국한 이후 팔관회를 아예 국가의 제천 행사화한 것이다.
<동사강목>은 918년 팔관회에서 옛 화랑을 본따 양가(良家)의 자제 네 사람을 뽑아 아름다운 옷을 입혀 춤추게 하고, 갖가지 유희와 가무를 보게 했으며, 이들을 선랑이라 했고,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였었다고 쓰고 있으나, 실상 고려 왕씨 왕조는 가까이로는 고구려의 후예로 좀 더 자처했다.
태조 왕건의 훈요 10조가 '천령(天靈) 및 오악(五岳)·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대회'라고 그 성격을 정의했고, 불교적 성격은 물론 토속 신앙의 제례적 풍습으로 상기시켰으며, 경신의 풍예가 희귀하기 보다 국가의 행사로 좀 더 만연하기를 바란 호족술책적 성격도 강했다.
송(宋)나라의 상인이나 여진(女眞) 및 탐라(耽羅)의 사절들까지 조공을 바치고 무역을 크게 행하는 국제적 행사이기도 했었다는 점에서도 과거와는 차이가 강조되었다. 태조는 훈요 10조를 통해 팔관회와 연등회 행사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후세에 당부하기도 했다.
고려 왕씨의 수도 개성에서 '옥불상'이 발굴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치 옥의 한반도 발굴의 실물적 증예만으로도 최소 1만년을 더 상고해야는 것으로 추정하지만, 중국의 진나라 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아 버린 중원의 관문을 경계로 한 그 동쪽지역의 몽골 일대까지의 옥타 혹은 홍산 문화는, 황허의 누르 인종 번성기에 훨씬 앞 서 갑골의 (복)희 왕조와도 이어 연립하는 다소 독특한 역사적, 세계사적 위상을 논해야 되기 때문이다.
고려 왕건은 문화의 류씨, 연안 차씨와 같이 고구려의 아버지 국가 부여의 해씨에 대하여 그 보다도 더 상대의 고조선 (롱)고리 (롱고미니아 혹은 롱기누스)의 왕씨로 갑골 희국을 친족 형제의 같은 연안으로 그 국가적 연원으로 강조해 왔고, 이후 청나라를 세우는 여진족은 고구려의 후예로 자처한 발해를 따르던 혈통의 부족이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멘튜리안(만주족) 여진과 그 청나라 아이씽은 티벳의 불교와도 연립한 끼단 세운날족 거란의 요나라와도 뜻이 또 달랐고, 고려는 각 친족을 인정하면서 가야와는 또 다른 측면으로 인도 아리안 샤카족과도 계속된 교류를 이은 차이가 없지는 않은 불교 숭상 국가였으나, 비치 옥타곤의 불상의 스펙트럼은 양 손의 엄지를 제외한 여덟개 8의 관계도를 숭앙하는 모계 후예의 흔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고, 8이 숭예하는 관계도는 구운몽 서사 성진의 8선녀에도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팔관 선녀"의 종교적 전례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거란의 요와는 달리 좀 더 동북측 발해의 여진은 희황조의 갑골과 태극 괘에 대하여 이후 청나라를 건립한 이후에도 널리 민가까지 12지신의 역술과 역학적 종교를 숭상했다는 차원으로도 섬세하게는 분립할 이유가 있다.
어찌하여 왜 옥타곤 팔관의 비치색 옥불상이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발굴이 가능한가에 대하여는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만하다는 뜻이다.
고려의 성종은 숭유억불을 목적으로 팔관회를 폐지하기도 했었고 태조 왕건의 유훈이 이유가 되며 재개최 되기도 했으며, 1170년 의종 24년 팔관회에서는 무신정변이 시작되기도 했다. 실상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했던 곳 역시 팔관회 장소였다.
필자의 관련 심화한 글들은 다른 기회로 미룬다. 섣불리 둑스나 악스카르리버를 위 기사에 더 풀어내는 것도 곡해만 더 크게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조선신보는 "북한에서 처음으로 옥불상이 발굴된 것과 관련해 김일성종합대학과 사회과학원 등 여러 학술연구기관의 교원, 연구사들이 망라된 연구집단은 지난 2년 남짓이 옥불상의 제작시기와 가치를 해명하기 위한 연구사업을 진행했다"고 전해졌다.
고려전기 건물터에서 발굴되었으며, 조선신보는 그 제작시기를 대략 고려전기로 추정하였으나, 더 상대부터 고려전기까지로 추정 가능해 보인다. 고려 건국시기 왕건 왕조에 투항한 호족 예물의 경우 불교적 신앙심만 좀 더 표출되었을 뿐 정확히 특정 호족을 지정하기는 모호할 수 있으며, 비치 옥의 기원은 옥저는 물론 곡옥까지 포괄한다면 상대보다 더 훨씬 앞 선 구석기 이후 전후의 선사시대까지로 거슬어 올라가기 때문이다.
세계적 독보의 옥 세공수준이 한 눈에도 보일 만큼 탁월한 것은 하루 저녁에 가능한 일은 아니다.
류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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