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새며서 바람이 거칠어졌다. 엄청난 세력권을 형성하며 서서히 다가 오고 있다는 태풍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 같다. 라디오의 비명이 찢어졌다. 휴, 날마저 이 모양이니, ……
“아이가, 이게 누꼬? 성화 맞제? 왔시몬 저 왔습니다 인사부터 해야제. 그래, 큰 댁에는 가 봤디나?”
오지랖이 넓다는 말을 자주 듣기는 해도 숭글숭글 늘 따습한 정을 느끼게 하던 친척 아주머니였다.
“예, 방금 들렀다가 이제 아버지 산소에 가는 길입니다.”
“그래, 그래야제. 그 똑똑하던 사람이 우야다가, 쯧쯧. 내는 마 그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겠는기라.”
“날이 사나워서 다들 걱정이 많으시겠습니다.”
그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싫었다.
“에그, 말도 마래. 지난 분 태풍 때도 나락이 몽창 나앉았뿌렸는데, 이번엔 더 시다카이 우야문 좋노? 참, 니 저 웃골 바위 옆에 신나무 알제? 그기 지난분 태풍에 뿌리가 뒤틀럈는지 영 비틀어지뿌렸다아이가,”
모양새가 그런대로 곧은 늙송이었다. 마을의 양기를 보호하는 신나무라 받들어 온 마을 어르신네들의 근심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아무리 바람이 거세었기로 모양새까지 바꾸어 놓다니 ……
“참, 서울댁도 잘 있겄제?”
아, 예, 서울댁. 물론 잘있습니다. 아마 지금쯤 큰 애 손잡고 컴퓨터 학원에 있을 겁니다.
“여보, 이것 좀 들어봐요.”
“이게 뭐라는 과일이요?”
“자몽하고 파파야래요. 아까 낮게 후배가 오면서 사왔어요.”
“뭐 이런 걸 사오나? 수박이며 포도 같이 맛있는 과일이 얼마나 많은데, ……”
“선배 찾아오는거라 신경 좀 썼겠죠. 요즘엔 슈퍼에만 가도 수입품이 천진데요. 뭐, 그건 그렇고, 여보 우리도 컴퓨터 한 대 사요. 당신도 필요하지만, 영빈이 좀 가르쳐야겠어요. 이번에 아버지 미국 가실 때 한 대 구해오시라 그럴까요?”
“영빈이는 아직 다섯 살 밖에 안됐잖아? 그리고, 한국에서도 컴퓨터는 생산되고 있어요.”
“무슨 소리예요? 요즘 조기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그리고, 콤퓨터도 그래요, 성능에다 수명 등등을 따지면 그게 더 싸게 먹혀요. 참, 그리고, 아까 후배랑 쇼핑 갔다가 이거 두 벌 샀어요,”
요사스런 무늬의 밥그릇이었다. 또, 일젠가? 요즘 부인네들은 집에서 돈 쓸 궁리만 하며 사는 거 같군. 좀 적당히들 하지 그래?
“밥 그릇 집에 있잖아?”
“어머, 왜 그래요? 이건 손님용으로 쓰려고 비싸게 하나 장만한 거라구요. 나머지 한 벌은 당신 국장님 찾아 뵐 때 가져다 드리면,”
“시끄러.”
대꾸하기가 싫었다. 어째 저런 여자가 가난뱅이 시인에 기자인 나같은 놈하고 결혼할 생각을 했을까? 그것도 일종의 사치성 중의 하나였나? 전시 효과. 겉 멋만 잔뜩 들어가지고 ……
“그래, 운제 올라갈라카노?”
“한 사나흘 쯤 있다 올라 가봐야지요. 어쩌면 더 길어질 수도 있을지 ……”
저만치 아버지 묘비가 보였다. 산소는 정갈히 정리되어 있었다. 하루에 두 번도 넘게 올라 왔을 노모의 손 내가 구석 구석 묻어 있었다. 그저 묵묵히 두 번 절한 그는 뉘엿 뉘엿 기우는 해를 마주 보며 털썩 기대 앉았다. 뒤적 뒤적 담배를 찾았다.
방 안은 담배 연기로 자욱 했다.
“여보, 혹, 당신 농사 지으며 살 생각은 없소?”
예상했던 대로 아내의 동그래진 눈이 그를 돌아다 보았다. 그리고서 별 실 없는 소리도 다 한다는 듯 읽던 책 속으로 다시 눈을 돌려 버렸다. 그녀의 뒷 머리채에 꽂힌 번쩍대는 머리 장식이 눈에 시려왔다.
“휴, 아니야. 내일 아침 나 부산에 내려가요. 지사에 들렀다 집에서 몇 일 쉬고 와야겠어.”
“어머 회사는요?”
“응, 국장님이, ……”
내가 이렇게 못 난 존재였던가? 국장의 비비 틀린 목소리가 달려 들었다. 할키려 손톱을 세우고 덤벼 들었다.
“최기자, 자네 아주 글을 함부로 내갈렸더구만. 뭐, 식언(食言)? 물론 자네가 시인에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아. 그렇지만, 지나치게 되면 우리가 뫼시기 곤란해진다는 것도 생각을 해야지, 안그래?”
식언을 식언이라고 했기로서니, 제기랄.
“자네 며칠 고향에서 쉬었다 오게. 아무래도 휴식이 필요해. 마치 자네 고향이 부산이니 지사에 들러 진 예하씨에 대해서도 좀 알아보고 말이야. 어쨌든, 자네, 기자 지망생은 수도 없이 많다는 사실은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잠깐만요, 국장님, 지금, 진 예하라 그러셨습니까?”
“그래. 이 사람아, 왜 있잖아, 요 번 우리 신문 특별 현상 공모에 당선 된 여자. 아직 시집도 안간 처녀가 보통내기가 아니라더군.”
야, 최지가, 자네 부인 덕 많이 봐. 그래도 그 인간 선심 많이 쓴 거라고. 산 위의 밤은 일렀다. 검은 구름이 별을 가려 버린 탓에 어둠을 한 층 더했다. 진 예하. 잊었다고 생각했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국장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모든 주위의 소음이 그저 왱왱 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이봐요, 최 선배.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죠? 싸움에서의 패배감, 더 세어진 입막음, 이게 지금, 선배의 변명거리인가요?”
복학을 하고도 마음을 잡지 못해 학교 앞 술집을 전전하던 그에게 마치 비수인 냥 날을 세우고서 다가 선 그녀는 당돌하고도 대찬, 문학회의 후배였다. 비틀대던 그가 그런 그녀에게서 처음 느낀 감정은 부러움 섞인 일종의 호기심 같은 것이었지만, 겉모습과는 달리 가을의 뒷자락보다도 서늘하고 쓸쓸하며 또 여린 그녀의 다른 이면들을 우연히 알게 된 후로는 점차 걷잡을 수 없는 열정으로 바뀌어 갔다.
“아, 예하. 로마에서 이루고자 한 걸작을 위해 내가 지불해야만 하는 나머지 삶의 무게가 너무 크다.”
투혼의 혁명가, 위대한 예술가, 이 둘 모두를 포기해 버리도록 나의 시간을 뒤죽 박죽 뒤섞어버린 운명, 그것이 예하라면, 그런 운명을 미리 조작해 놓은 것은 아마 아버지일 겁니다. 감상적이고 탐미적인, 그리고 도피적인 유전 인자. 그녀에 대한 그 불 같았던 사랑은, 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몫이 아니었을까요?
“최선배, 이대로 집어칠 거야?”
“최선배, 이대로 집어칠 거야?”
“이따위, 이 따위 시나부랭이가 뭐라고 내가 매달려야 하지? 끝장 내겠어,”
“언제 제대로 글 한 줄 썼다고 그런 소리를 해요? 멍하니 정신 빼고 그에 사나 싶더니, 이젠 아예 죽는 시늉을 하는군. 왜, 결혼이라도 할까요?”
그에 대해서 유독 매서웠던 그녀가 어느 날 홀연 사라져 버렸을 때, 그는 절망보다는 분노로 온 몸을 떨었었다. 배경 좋은 아내, 사회적인 성공, 이것들이 내가 택한 복수였나? 시집을 펴내고도 남을, 그녀를 향한 글들이 시커먼 재로 화해가던 날을 떠올렸다. 아직 시집 가지 않았다 했던가?
“허 허 허 허”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고 뱉어버렸다. 아 아, 젠장. 온 사방의 고요가 몇 배의 소리침으로 전신을 때려왔다.
“살어리 살어리 랏다, 청산에 살어리 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
너무 깊히, 너무도 철저히 심어 두셨군요. 몇 번이나 성냥을 그어 댔지만 제대로 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사실, 저라는 인간이 원래부터 목대를 잡을 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곧추켜 세워보려 해도, 가장 절실한 순간에 와서는 분명 어디론가 도피하고 마는 인간을 만들어 버린 것은 아버지란 말입니다. 바람이 소나무 숲을 헤집고 지나갔다. 파도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겨우 붙혀 문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았다. 허한 속으로 빨아들인 담배는 온 전신으로 어지럼증을 느끼게 했다. 그래요, 저도 결국엔 아버지의 청산으로 돌아오게 되고야 말리라는 예감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 결코, 아버지처럼 멱라지귀가 되진 않을 겁니다. 물이 더럽다면 발이라도 벗으라 했던가요? 틔여진 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만 하다면, 제가 돌아와 누울 이 수풀 우거진 곳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돌아갑니다. 또 다른 칼날을 번뜩이며 저의 운명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먼 데 구름이 열린 새로 가뭇 몇 개 별 빛이 비쳤다.
이번 태풍은 제발 비켜가야 할 텐데.
멀리 그를 찾는 성형의 목소리가 올라 오고 있었다.
단편 <청산별곡에 붙여>는, 필자(저자)가 대학 입학 뒤 처음으로 대학신문으로부터 청탁을 받은 글이 게재되고, (적지만 소정의 고료도 받았고), 그 때부터 좀 더 문학과 작품 활동이라는 것에 대하여 구체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 해 겨울 대학신문의 문학상에 처음으로 투고를 했었던, 첫 번째 단편이었습니다.
이후 2학년이 되고 소설문학 동아리에 가입을 하면서, 그 심사위원 (김중하)교수님이 동아리의 지도 교수님 겸 그 번 년도 심사위원장이셨던 것도 처음 알게 되었었습니다.
사실 내심으로는 탈락에 저으기 실망하고 있었던, 나름 단편의 완성도며 기존의 낯설게하기 보다 한 걸음 쯤은 더 한 완성도까지의 한 층 독보적인 작품이 아닌가며, 한참은 자부심을 키우던 때였던 지라, 진정 내심으로는 대학신문쯤(?) 기고글로는 아까운? 것 아니냐는 자평까지로 혼자서 자못 의기양양히 투고를 했었다가 보기 좋게 낙선된 것에 대한 불만 같은 것을 여전히 갖고 있었던 터에 대하여, 그제야 의당 그 해 당선작이 운동화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는 주경야독의 주인공에 관한 단편이었던 것에 대한 납득 아닌 납득과 세상에 대한 일층 새로운 눈을 기르게 되었었다고 자평 아닌 자평 했었던 쑥(?)쓰러운 에피소드를 품고 있는 작고 또 나름 큰 글이었습니다.
우듬지 동아리 회원들의 첫 번째 단편 모음집 <습작>에 게재된 저의 첫 단편이었습니다.
청산별곡에 붙여.
첨언하자면, 저어기, 부쳐가 아니라, "붙여" 입니다. ...
류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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