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백제 금동대향로 발굴 30년 특별전 연기 휘두르다...희롱 펑황 여래 픠움하였다

(섬세한 탈고는 게재 지연을 이유로 생략. 오탈자를 비롯 추후 탈고를 예정해 둡니다.)

류임현 기자 승인 2023.12.11 16:19 | 최종 수정 2023.12.14 00:15 의견 0

국보 백제 금동대향로 발굴 30년 특별전 연기 휘두르다...희롱 펑황 여래 픠움하였다

백제 금동대향로 발굴 30주년 맞아…"고대사 참모습 밝혀주는 증거"

부여박물관, 30주년 기념 전시 중…12일 발굴 주역 모여 고유제

국보 '백제 금동대향로' 세부 모습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윗 뚜껑의 최상단부에 관처럼 올려져 새겨져 있는 신물은 비치는, 뷔드리는 여의주를 가진 틀림없는 용(롱)이다. 혹자들은 향로 하단의 용과 구분하여 봉황(새)로 보기도 한다.

처음 발견 당시 명칭은 백제 '금동용봉 봉래산향로'였다.

인류의 "말"의 마더, 옴므랜드는 어디일까?

중국 말의 어원과 기원은 한반도에서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한반도의 "말"이라는 사실은 일찌기 중국의 학자들도 인정한 바였다. 중원의 한족도, 사막의 누르족들도, 동북 홍산의 옥족도, 실상은 대략 몇 만년을 기원으로 한반도 남부에 정착한 문명족의 폭발적 언어 및 표기화 전개 이후 그 언어의 전파로 번성하게 된 인류 언어의 종족인 것이다.

아니, 비단 아시아 대륙의 종족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인류와 문명 그리고 언어의 차원 전체를 포괄한다.

필자는 독자적 연구를 거듭하며 인류의 언어 "말"의 기원 및 어원, 그리고 문자의 루트의 추적이 "인류사회의 문명사" 즉 "호모 까락떼루스(Homo carácterus) (잠정적 명칭)"의 전파를 통한 가닥과 갈래의 나뉨까지를 추적 가능하게 한다는 잠정적 결론에도 이르렀다. 인류가 인류이게 한 가장 중요한 한 특징으로서의 언어 역량과 그 소통체계의 폭발적 전개와 통용 말씀이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가 과연 그 몇 만 년일까? 결코 그렇지는 않다. 구석기로 불리는 선사시대의 발굴되는 유적만 몇 십, 몇 백만년에 이른다. 인류는 코끼리로 이어진 빙하기의 거대한 맘모스는 물론, 그보다 더 앞 서의 롱, 즉 흔히 용으로 표상화된 그 종족들과도 공존하였던 오랜 종족이었으며 그들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전승되며 표상화된 실재였기 때문이다.

단지, 인류가 폭발적으로 인류문명화의 인류가 된 그 기점에 대한 차원이며, 인류가 인류로서 그 존재에 대한 자각과도 같이 인류보다 더 위의 어떤 존재까지에 대하여 픠움으로서 생존을 잇게 된 것을 기리고 빌며 인류가 인류되게 된 그 폭발적 지점에 대한 것이다.

초기 고리국 단군 왕검의 고조선이 중원의 한나라에 밀려 국권을 잃고 얼마의 세월이 지났을까?

실상 기원전 수 백년전 부터 점차 여러 한민족 예맥 계열의 나라가 세워졌으니 동명왕이 세운 부여,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와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 그리고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그 영향을 받은 백제가 한민족 예맥 계열의 나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한 종족들이며, 오히려 은력(殷曆, 은나라 역법)을 사용하였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사실상 고리 고조선과 비슷한 연대에 대하여 중국은 중원의 종족으로 하나라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복희 갑을의 은허가 중원 종족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중원의 종족은 뻬이징 원인을 그들의 직계 조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앞 서도 논기하였듯, 중원의 자손들도 이미 그들의 "말"부터 한반도에서 기원한 말이었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인정하였다. 물론 복희 갑을의 갑골 또한 마찬가지다. 한반도 남부에서 인류 문명화의 말과 표기화를 폭발적으로 전개시킨 그들이 바로 또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라는 오히려 앞 서 중원을 차지한 그들로서 쟁투를 벌이다 중원에서 밀려나서 되 동진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상나라에 여전히 그들의 씨족 종족인 희씨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다행으로 여겨질 만큼 남은 상의 것들은 너무도 상스러웠고 드세고 거셌으며 끊임없이 침략과 정복야욕을 드러냈다. 중국 중원의 역사는 그 상과 하의 경쟁과 다양한 씨족 종족들까지를 한 데 통일을 꾀한 영웅걸세출 제국주의 야욕의 역사처럼도 보인다.

더 큰 문제는, 하나라를 경계로 동진한 희씨의 하(늘)나라의 청동 신검족들이 점차 더 독자적인 영토와 국가를 포기할 수 없는 역사적 전개에 있었다. 피부색이 흰 그들이 중국의 중원에서 이룬 더 다른 다양한 호족적 트기와 상과 하의 전개와 또 달리 더 동진한 그들 신검 종족은 드센 상과 하를 이길 수도 있었을 지언정 그들과는 본연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그들은 그들을 신족으로 알았고 하늘의 신과 하늘과 하늘의 천문을 경신하고 섬겼던 때문이었다.

나아가 더욱 하늘을 따라 동진한 그들은 이미 상스런 상과는 "말"이 더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흰 호랑이는 마늘도 먹기 싫어 했으나 마늘도 잔뜩 먹어낼 수 있는 다르하 곰녀 웅녀들을 왕의 비들로 맞은 그들의 트기의 자손들도 강성히 번성한 것이다. 상과 하의 통일을 이룬 중원의 한나라의 제국주의가 결국 한반도 일대까지로 밀어내기까지 고리 고조선의 단군 왕검의 아스달은 그 나름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웅 상 기가로 서남 아시아 인도 브라만까지 들어가 정복하게 되는 그들과 언어의 기원이 같은 기자의 무리나 위만이 중원 제국주의와 경쟁하며 고조선으로 더 동진하여 트기를 이루고 고리 고조선을 자칭 타칭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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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금동대향로 발굴 당시 모습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국보 중의 국보'로 꼽히는 백제 금동대향로가 오는 12일로 발굴 30주년을 맞는다.

1993년 백제의 왕릉급 무덤이 모여있는 충남 부여의 능산리 고분군(현재 부여 왕릉원) 서쪽에 자리한 능산리의 절터에서 나온 향로는 백제의 미술사와 고고학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향로는 절정 우연한 기회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0년대 초에 부여의 왕릉원과 주변 고분 모형의 전시관을 찾는 관광객이 늘자 부여군 등이 관광객을 위한 주차장을 조성하고자 정비 작업에 나섰고, 1992년 12월 4일부터 이듬해 1월 7일까지 시굴 조사로 건물 주춧돌 일부 및 기와·토기 조각 등이 나오자, 1993년 10월 국립부여박물관을 중심으로 2차 조사가 이뤄진 것이다.

그 결과, 금속품과 유리구슬 등을 만든 것으로 추정하는 공방 터(조사 당시 제3 건물터)에 있던 타원형의 아궁이에서 뚜껑과 몸체가 분리된 향로가 당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탄성과 긴장감을 자아내며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물이 흥건한 진흙투성이에서 나온 1천500년 전 백제의 "향로", 픠움의 결정체, 백제국가 장인의 손끝에서 피어난 우주, '백제 금동대향로' (당시 명칭은 '백제 금동용봉봉래산향로') 였던 것이다.

백제의 건국 역사는 고주몽의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발원한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필자의 연구 아래 첨언해 두자면, 예맥족 (북)부여의 왕조의 서자인 아들들을 데리고 또한 동부여의 서손인 고구려 태조의 왕비가 된 소서노의 졸본부여의 통합은 결국 예맥 부여족과 해족의 일대 고대국가로의 통합의 과정이었으며, 소서노의 아들들이 그들 왕조를 여는 백제로 이주한 것은 오히려 또 다른 "야만"적 강성을 전통한 동북권역 다수 초기 인디의 만주족들과도 맞닿은 고구려에 대하여 한반도 "말"족의 갑골한족 예맥의 북진 트기 없는 남하를 의미하는 것이다.

더 앞 서 고리 고조선의 전개 가운데 일부 희씨, 흰 범이나 신검 종족들의 각 남하와도 구분되는, 구석기부터 정착한 다수 한반도 선사 종족들이 정착한 남쪽 땅에 고조선의 다르하 곰녀 트기 전개 이후 고조선이 망하자 삼한이 드러섰고 북부의 갑골 예맥 왕족중 일부가 더하여 남하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중국 중원의 상나라 후예 종족들이나 그곳의 희씨들보다, 더 앞 서의 만주 인디 종족들과도 달리, 의사소통이 더 쉬운 고조선 고리 선조들의 땅이 되어 있던 한반도 서남부의 지역이 낫다고 판단되었을 것이며, 그곳에 가까이 부여 왕조의 씨족임을 펼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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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발굴 현장 모습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발견 당시 향로 아래에는 나무판자 4개가 깔려 있었고, 공방에서 작업할 때 필요한 물을 저장하는 목제 수조의 바닥 부분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았다.

청동에 금박을 입힌 걸작의 향로가 오랜 시간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아래에 묻혀 있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은 없었다. 큰 용의 곁에서 희씨의 그늘 아래 큰 세상을 희롱하였던 먼 앞 대의 기억도, 샤카(하)족과의 트기의 기억, 다르하 샤카 곰녀의 자손으로 제사를 모시던 왕조 신검 국가의 기억도, 희고 큰 여래의 재림을 기원하는 신검들의 불타의 기억도, 모두 담아 제의할 수 있다면 그것이 낳은 걸작이 금동여래좌상과는 또 다른 금동향로였을 것인 때문이다.

픠움. 그것은 언어의 기원이자 복 희의 종교와 왕조 씨족의 기원이며, 샤카의 승려와 종교를 한 번 더 받아들인 그들의, 백제를 연 그들과 그들 지역에 자리잡았던 그들의 통찰되고 포괄된 그들 전체의 기원이었던 것이다.


향로를 발굴한 타원형 구덩이의 조사 전 모습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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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금동대향로를 수습한 뒤의 모습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오랜 세월에도 제 모습을 잃지 않은 향로가 발견됐다는 소식에 관심은 뜨거웠다.

약 10일간 긴급 보존 처리를 마친 뒤, 그해 12월 22일 현장 설명회를 열자 언론에서는 '백제의 예술혼', '동북아 최고 걸작' 등의 수식어를 붙여 1면 기사로 대서특필했다.

그야말로 "백제" 문화의 정수가 담긴 향로를 보려는 사람들의 문의가 빗발쳤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학계에서도 '보면 볼수록 신비한' 작품이라는 평가가 다수다.

중국 한나라 때 유행한 '박산 향로'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으나, 박산향로가 만주의 인디 훈족이나 당나라의 호롱과도 연계를 찾기는 힘들 것이듯, 백제 금동대향로의 섬세한 공예 기술과 조형성, 창의성의 차별성은 물론 한나라에서 비슷한 향로 모형의 사례를 찾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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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백제 금동대향로'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높이 61.8㎝, 무게 11.8㎏인 향로는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돼 있다.

아래부터 보면 힘차게 튀어 오르는 듯한 용이 받침을 이루고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케 하는 몸체, 23개의 산이 4∼5겹으로 돼 있는 뚜껑, 뚜껑 위의 봉황 등이 배치돼 있다.

향로에 생생하게 표현된 86개의 얼굴도 주목할 만하다.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는 모습의 새, 무예의 한 동작을 묘사하는 듯한 사람, 세로줄 무늬가 돋보이는 호랑이, 날개 달린 상상 속 동물 등이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

긴 코와 상아, 커다란 덩치로 표현한 코끼리 모습도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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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백제 금동대향로' 세부 모습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신나현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연꽃잎 한 장, 산봉우리 하나마다 생생하게 담긴 86개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백제인이 꿈꾼 이상세계의 평온함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당대 백제 문화를 보여주는 집약체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향로는 벌집과 소기름을 섞은 밀랍 덩어리를 녹여 여러 도상을 새기거나 붙이는 방식인 "밀랍 주조법"으로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같은 향로를 만드는 건 쉽지 않다는 게 학계 중론이다.

공기를 빨아들이는 구멍 5개와 연기를 뿜어내는 구멍 7개 등 총 12개의 연기 구멍 가운데 일부 크기를 수정한 점에서는 당시 백제인들의 정교한 공예 기술도 엿볼 수 있다.

악사들이 연주하는 악기, 사람들의 옷차림, 다양한 동식물 등도 연구할 부분이 많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는 "정말 만나기 어려운 유물"이라며 "향로가 출토된 (역사 문화적) 맥락, 함께 출토된 유물, 당시 금속 공예 기술 등을 폭넓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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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금동대향로 3.0-향을 사르다' 특별전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국립부여박물관은 발굴 30주년을 맞아 향로의 의미를 되새기는 전시를 열고 있다.

내년 2월 12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백제 금동대향로 3.0-향을 사르다'에서는 향로가 출토된 타원형 구덩이를 연상시키는 듯한 공간에서 향로와 마주할 수 있다.

박물관 관계자는 "상처받은 백제인의 아픔을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심어준 향에 집중한 전시"라며 "하루 평균 1천500명 이상이 관람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물관은 오는 12일 '특별한' 손님을 초대하는 행사를 연다.

당시 관장으로서 발굴을 이끈 신광섭 전 백제문화제재단 대표이사를 비롯해 조사 발굴팀과 박물관 관계자들은 능산리 절터에서 발굴 30주년을 기념하는 고유제를 올릴 예정이다.

신광섭 전 관장은 "백제 금동대향로는 우리 고대사의 참모습을 밝혀주는 유일한 증거이자, 그동안 저평가된 백제사를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의의를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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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금동대향로 3.0-향을 사르다' 특별전 모습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참고로, 필자는 문화 류가 (고려 류 경공의 직손) 류 만수 좌상공파 본적 경남 김해 문중의 34세손입니다. 희 황족의 직계후손이나 제사는 문화 류가로서 일 년에 11개의 종손 제사를 모시는 가례로 컸습니다. (조모는 앞 서 일찍 돌아가신 진양(진주)강씨 할머니 및, 아버지의 어머니 달성서씨 할머니 두 분입니다.)

고조선 이래 강남 연안 왕가, 연안 차가, 문화 류가의 세계도(世系圖) 관련 상세한 기술 또한 다른 기회로 미룹니다만, 퓌 (ㅎ)힘의 희 황족에 대한 유래는 희나리 등으로 남아 오래 전해져도 왔으나, 중원에서 뿔뿔히 흩어지며 (팔)괘와 점술 등의 전래에 있어 (복)희에서 더 앞 대 언어 발원의 픠고의 (가)히, 히브루, 샤ㅎ하, 등 다양한 종교적 세력으로도 나뉘고, 한반도 북부 일대에서 한자음가의 전개 정착 가운데서는 중원의 좀 더 야만적이거나 잔혹하게 드센 한족들과의 경쟁 속에 상황제로 존칭하기 위하여 백, 전, 신, 왕, 등으로도 나뉘었고, 대체로 중국의 중원에 남았던 희씨 황족의 남은 (복)희씨들이 재집권하게 되는 차후 명나라 때는 이미 몇 천 년에 걸치며 다양한 다른 결합들을 이루고 주(저우)씨로 성씨를 바꾼 뒤였던 만큼 현재의 전혀 다른 국가로도 나뉘게 된 것입니다.

대체로 잠정적 결론으로 언어의 좀 더 앞 대 발원 및 원시적 폭발적 문명적 초기의 전개는 한반도 남부, 현재의 경상도, 낙동강 유역, 특히 낙동강 하구와 부산 앞바다, 남해 연안으로부터 였으며, 삼한은 그 보다 훨씬 더 후대로 판단합니다.

한반도 남부 (정착)에서 북진의 되너덜 튀, 그 곳에서의 서진이나 동진의 오랜 역사는, 차후 중국에 남은 세력들의 전개 가운데 남경 세력 및 북경 세력의 차이조차 클 수 밖에 없듯, 현재 몽골 지역이나 홍산 옥산 문명과의 이주나 트기의 연계 관계도상 스펙트럼 또한 클 수 밖에 없고, 실상 앞 서 송화강 및 아무르강 연안의 몇 인디오 종족들과의 연계 관계도상 스펙트럼들은 대략 몇 만년을 기점으로 인류사 및 폭발적 문명적 언어 전파를 짐작하는데 있어 각 중요한 대목들도 됩니다.

(간단히 논급할 연구는 아니므로 집대성한 저서, 저작화를 해내기 위한 여력을 갖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부분 부분 기재하는 수준이 아닌 집대성은 좀 더 말년으로 미뤄질 수도 있겠으며, 그런 와중에서도 어떻게든 다양한 글들 가운데 쉽게 참고 가능하시도록 논술해 둘 계획이므로 관련 자료나 의견이 있으시면 연락도 주시기 바랍니다.

단, 다양한 쪽겨를로 인하여 쫒기듯 기재되어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 싶은 부분들이나, 심지어 오탈자가 있을 수도 있겠는데, 그런 경우도 연락주시기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현재 요 첨언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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