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쿵깜놀 대신 기자 한마디인 이유...해동용궁사는 금강반야바라밀경론이 왜

류임현 기자 승인 2024.05.15 03:02 | 최종 수정 2024.05.15 16:49 의견 0

해동용궁사 대웅보전 측면에서 찍은 하늘. (사진; 류임현)
대웅보전은 1970년대 정암(晸菴) 스님이 중창한 것으로, 이 절의 주지가 되어 관음도량으로 복원할 것을 발원하고 백일기도를 하였고 꿈에 흰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이 용을 타고 승천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을 해동용궁사로 바꿀 당시의 목조건물이다.
하늘의 숨은그림(?) 찾기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보일 듯 합니다.

해동 용궁사는 1376년 공민왕(恭民王)의 왕사(王師)였던 나옹대사(懶翁大師)의 창건으로 한국삼대관음성지(三大觀音聖地)의 한 곳으로, 바다와 용과 관음대불을 각각 모셔 조화를 이루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왔다.

구도(求道)보다는 중생이 진심으로 구복(求福)의 기도를 하면 꼭 현몽을 받고 한 가지 소원을 이룬다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다만 해동용궁사 측의 "1376년 고려 말 고승 나옹화상이 창건한 사찰로 옛 이름은 보문사이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지만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통도사 운강(雲崗)이 중창하였고, 1974년 정암(晸菴) 스님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관음도량으로 복원할 것을 발원하고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꿈에서 흰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이 용을 타고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 하여 절 이름을 해동용궁사로 바꾸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1970년대에 창건되어 역사가 반 세기 남짓한 신생 사찰일 뿐이다."라는 주장이 맞서 논란과 논쟁이 빚어지고 있는 곳이다.

대한불교조계종으로 대표되고 있는 불교 전통사찰과는 차이가 있어 보인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을 비롯 굴법당·용왕당(용궁단)·범종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대웅전은 주지 정암이 1970년대에 중창하였다. 대웅보전의 곁에는 다른 조계종 불사들과 같이 삼보륜(각주)이 그려져 있다.

대웅전 옆에 있는 굴법당은 미륵전이라고 하여 목조등 건물이기 보다 창건 때부터 미륵좌상 석불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손이 없는 사람이 기도하면 자손을 얻게 된다 하여 득남불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해동용궁사 굴법당(미륵전).
교과서적 표현의 유불선이 융합된 양식이라기 보다, 바닷가 암자에서 신내림을 받는다거나 용신제를 모시거나 푸닥거리며 구복하는 행위들을 포괄하는 좀 더 원시신앙으로부터의 내력과 기운이 더 느껴지는 곳이다.
한 마디로 터가 세고 기운이 세며 신빨이 설 만한 곳이다.

해동용궁사 용궁당.

교과서적 표현의 유불선이 융합된 양식이라기 보다, 바닷가 암자에서 신내림을 받는다거나 용신제를 모시거나 푸닥거리며 구복하는 행위들을 포괄하는 좀 더 원시신앙으로부터의 내력과 기운이 더 느껴지는 곳이다.

대웅전 앞에는 사사자 3층 석탑이 있는데, 원래 이 자리에는 3m 높이의 바위(미륵바위)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절이 폐허가 되고 6·25 전쟁때 해안경비망의 구축으로 파괴되어, 1990년에 정암이 파석을 모으고 손상된 암벽을 보축하여 이 석탑을 세우고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불사리 7과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밖에 단일 석재로는 한국 최대의 석상인 약 10m 높이의 해수관음대불, 동해 갓바위 부처라고도 하는 약사여래불이 세워져 있다. 절 입구에는 교통안전기원탑과 108 계단이 있고, 계단 초입에 달마상이 있는데 코와 배를 만지면 득남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상업적인 행보로도 논란이 많이 되어 왔고 사실상 여전히 터가 세다고 할까, 뛰어난 바다 풍광과 바람만큼 원시종교의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대놓고 드러나 있는 바위의 사진도 소개하기에 앞 서, 대웅전 측면의 조금 다른 사진도 한 번 더 먼저 게재하도록 한다.

필자는 그날 하늘의 구름과 기운이 흘러가는 모양새를 보며 대웅보전 측면의 하늘을 몇 차례 더 찍었다.

아래는 첫 번째의 사진보다 대웅보전 측면의 삼보륜이 좀 더 보이게 찍은 사진이다.

같은 장소도 각기 다른 사람이 보는 것, 보이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사진에 더 가깝다 해야 될 것이다.

필자에게 찍힌 대웅보전인 셈이다.

하늘의 구름과 기운이 흘러가는 모양새를 보고 대웅보전 측면의 하늘을 몇 차례 더 찍었다.
첫 번째 사진보다 삼보륜이 좀 더 보이게 찍은 사진이다.
같은 장소도 각기 다른 사람이 보는 것, 보이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사진에 더 가깝다 해야 될 것이다.
필자에게 찍힌 대웅보전인 셈이다. (사진; 류임현.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다.)

해동용궁사는 바다를 끼고 있는 암자로 더 알려져 있다.
앞으로 내다 보이는 바다에 누운 바위는 인류 원시 사회와 원시종교의 원형을 그대로 담고서 증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ㄹ띠라. mutilar la cabeza.

필자의 연구는 그들 사회의 푸닥거리, 푸두는 먼저 푸리아(furia)였음에 주목하였으나, 그보다 더 앞 서 여전히 같이 말하고 있는 '무ㄹ띠라'였음에도 주목하였다.

담(tapia, muro, muralla, pared, cerca)과 사회, 그 것은 생존을 위한 배척이며 우열을 가리는 지독히 잔혹한 '띠'기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자손으로 하여금 잇도록 하려는 본능에도 더 가까운 강렬한 욕망의 표출이었다.

모든 우주의 섭리는 흡사 에너지 보존의 법칙인냥 균형과 질서를 하나ㄹ의 원, 무즉유로 유즉무로 이루어져 있으며, 구복(求福)에는 항상 제물이 요구된다는 무격과 주술의 법칙이 있다.

구복의 희생양 혹은 제례의 제물을 같은 인류의 종족이 아닌 다른 생명체로 대체하기 시작한 인류의식의 진전이나, 인류를 대체하는 다른 제물 생명체의 12지신의 기운 운기 작동의 역동 변이를 점치기 시작한 선각(先覺)이나 같은 깨달음의 연장선상의 것일 것이다.

(사진; 류임현.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다.)

아수라.

아수라(阿修羅, 산스크리트어: असुर, 영어: Asura)는 인도 신화에 등장하는 인간과 신의 혼혈인 반신이다. 신에 대적하는 악한 무리로 나타난다.

인류가 빚어내는 세상은 신들에 반기를 드는 신과 인간 혼혈의 반신인 아수라와도 같은 것이다.

아수라를 지옥에 빚대기도 하지만 흡사 절망 속의 희망, 동굴과 같은 어둠 속으로 비추는 빛살, 칠흙 같이 어두운 밤을 비추는 달빛과도 같이, 아수라와 지옥조차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진; 류임현.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다.)

해동용궁사 인근의 볼거리 소개로는, 주차장에서 내려 2분만 걸어가면 동양철학의 육십갑자 십이지상이 봉안되어 있고 안정운행을 기원하는 교통 안정 기원의 탑도 있다.

춘원 이광수의 시비와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라고 노래한 나웅화상의 시귀도 새겨져 있다.

정렬된 석등군, 검푸른 넓은 바다, 굽이치는 바다로 용궁으로 들어가는 길과 하늘로 승천하는 용이라도 나타날 듯한 풍광이 감탄과 환희 아래 펼쳐진다.

백호바위에 약사여래석불이 모셔져 있으며 조금만 더 가면 해가 제일 먼저 뜬다는 일출암이 자리하고 있다.

작게는 나무와 가지들마다 그 모든 것을 보고 울었을 새들의 흔적과 기운들조차 되엉겨 살아날 듯 한 곳이다.
솟을 나무위의 새들은 죽은 이들의 영혼과 같이 길동무로 날려 보내던 울음들이다.
12지신의 유(酉)는 그야 말로 푸두 푸닥거리의 제물이 되는 날지 못하는 닭, 을(乙)이다.
(사진; 류임현.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다.)

사실 필자의 글이 심쿵깜놀이 아닌 "기자의 한 마디" 섹션으로 분립 게재되게 된 것에는 또 다른 연원이 있다.

문화 류가 류 경공의 (평양 이전) 강화도 보존의 모든 유물, 유산들에 대하여 직계 좌상공파 류 만수 어른의 김해 문중 또한 누대로 보관하고 있던 문화재, 국보급의 서적과 보물들은 조선조 및 특히 일제시대를 거치며 대부분 도난을 당하거나 빼았겼다.

그 중 일부는 독립운동자금을 대기 위해 몰래 쥐어보낸 뒤 도난 당했다고 알린 것도 많았다.

한 마디로 글로벌 전체로 퍼져 있는 고려 시대를 거치는 그 많은 유물 유적들의 대부분이 류 경공의 소장품들로서 (어떤 루트로든 장물이 된) 가문의 유물 유산이라고 하면 간단하다.

해동용궁사는 필자의 조부의 책으로 추정되는 <금강반야바라밀경론(金剛般若波羅密經論)>이 보존된 곳이다.

고려 후기 고종 23년(1236) 해인사 대장경판을 만들기 위해 설치한 대장도감에서 고려대장경에 편입시키기 위해 간행한 불경이다. 책에는 계묘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라는 간기가 있다.

현존하는 이 책은 훗날 조선 세조가 간경도감에서 별도로 판본을 인출하여 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인출한 후쇄본이지만 재조대장경판으로 인쇄하였고, 현재까지 이 경전이 남아 있는 예가 많지 않다. 2014년 9월 24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7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강반야바라밀경론(金剛般若波羅密經論)
해동용궁사에서 보관하게 된 경로는 현재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늘의 구름과 기운이 흘러가는 모양새를 보고 대웅보전 측면의 하늘을 몇 차례 더 찍었다.

첫 번째 사진보다 대웅보전 측면의 삼보륜이 좀 더 보이게 찍은 사진으로, 두 번째 사진과도 약간 차이가 있다.

같은 장소도 각기 다른 사람이 보는 것, 보이는 것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사진에 더 가깝다. (사진; 류임현.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다.)

탈자가 있어 정정하였으며, 삼보륜으로 정정 기재하고 대한불교조계종에 대하여 간략한 설명을 첨부합니다.

각주>

▷ 삼보륜; 대한불교조계종의 이미지를 대표적으로 표현한 상징.

▷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 9세기에 창시된 대한민국의 불교 종단 중 하나. 현재 유일하게 불교 군종장교를 배출하고 있는 종단.

"조계"라는 낱말은 중국 선종의 제6조(祖)인 혜능(慧能)의 별호에서 유래하였다고 대한불교조계종은 주장하고 있으며, 광둥 지역의 조계산에서 유래했으나 조계산의 보림사를 중심으로 하는 혜능의 영향으로 선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광둥지역은 누대로 중국 한족에 지속적으로 저항하며 통치를 거부하고 대체로 잔혹한 대적행위나 식육행위 등도 서스럼없이 자행하며 자치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지역이다. 한 때 프랑스가 식민지로 통치한 지역에 이른다.

중국 삼국시대의 조조의 성씨의 조자와도 같다.

불교 조계종의 정체성은 비구 승단, 비구승 수행의 중심인 선(간화선)을 표방하는 성격이 있다.

조계종이라는 종파 이름이 한국 불교의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종명이 분명하게 명시된 사료로 1172년 (명종 2년)에 세워진 <고려국조계종 굴산하단속사대감국사지비>등이라고 전하는데, 신라 때부터 내려온 9산 선문(九山禪門)을 고려 때 합친 것으로 전한다.

고려에서 속세의 성씨가 왕씨인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이 수립한 천태종이 종세(宗勢)를 확장해가자 이에 당시의 선종(禪宗)의 제 분파들이 자극을 받아 합쳐져서 성립된 것이 조계종이라는 것.

앞 서 불교 종파는 크게 불교의 경(典), 논(論) 등을 소의(所依)로 하여 그 사상적 이론을 세우며 교종수행을 하는 교종 및, 참선이나 공안 참구를 위주로 하는 선종으로 나뉜다.

(한국불교 수행자들은 대체로 사교입선(捨敎入禪)이라 하여 처음에는 경전공부로부터 출발하여 궁극적으로는 선(禪)의 경지로 들어가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교(敎)는 점수(漸修)의 수행법, 선(禪)은 돈오(頓悟)의 수행법이라고도 한다.)

중국 불교에서 볼 수 있는 13개 종파, 곧 비담(毘曇)ㆍ성실(成實)ㆍ율(律)ㆍ삼론(三論)ㆍ열반(涅槃)ㆍ지론(地論)ㆍ정토(淨土)ㆍ선(禪)ㆍ섭론(攝論)ㆍ천태(天台)ㆍ화엄(華嚴)ㆍ법상(法相)ㆍ진언(眞言) 중에서 율ㆍ선ㆍ정토를 제외한 나머지 10개종이 교종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교종(敎宗)이란,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 가운데 잠깐 유화기를 맞았던 1424년(세종6)경 선(禪)ㆍ교(敎) 양종이 통합을 꾀할 때 화엄(華嚴)ㆍ자은(慈恩)ㆍ중신(中神)ㆍ시흥(始興)의 4종파를 합한 불교 종파를 말한다.

참고로, 漸(점): 육십사괘(六十四卦)의 하나로, 손괘(巽卦)와 간괘(艮卦)가 거듭된 것으로 산(山) 위에 나무가 있음을 상징(象徵)한다.

漸入佳境(점입가경)

류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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