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연제구는 배산성지 5차 발굴 조사 결과 성곽 추정 구역에서 성벽을 발견했다고 13일 밝혔다.
이 성벽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집석과 배수 시설로 추정되는 석축도 발견됐는데, 이는 배산성 내부 시설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연구 자료로 이용되겠다.
이와 함께 180점에 달하는 유물도 출토됐다.
올해 3월부터 실시한 5차 발굴 조사는 연제구 연산동 산 35-6, 10-59, 수영구 망미동 산 67-3 일원에서 진행됐다.
발굴을 진행한 조사단은 "지금까지 밝히지 못한 배산성지 동쪽∼남쪽(수영구 범위)의 성곽 구역 등에 대한 실체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1972년 부산시 기념물로 지정된 배산성지는 고대 사회 군사적·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부산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 유적이다.
연제구는 2016년 정밀 측량 조사를 실시한 뒤 배산성지에 대한 조사를 이어오고 있다.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이 밝히고 있는 '배산성지'
배산성지는 연제구 연산동에 위치한 배산(盃山)의 중턱과 정상부에 있는 옛 성터. 이 지역 옛 지명 거칠산국(居漆山國)시대 유적으로 추측.
『삼국사기(三國史記)』 「거도열전(居道列傳)」에 보면 신라 제4대 탈해왕 때 거도(居道)라는 장수가 거칠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에 병합하고 거칠산군을 두었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기록에 나타난 정확한 시대(연대)에 대하여는 고증이 필요한 문제이나,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시기로 본다면 배산성지가 있는 동래 지역(연제구 지역 포함)은 신라에 병합되기 전의 부족국가시대(部族國家時代, 삼국시대)였움을 추측 가능.
또한 배산성지 아래 쪽 능선에 연산동고분군(사적)이 있고, 온천천을 사이에 두고는= 복천동고분군(사적)과 마주보고 있어, 배산성과 복천동고분군 및 연산동고분군 사이의 관계가 주목받고 있다.
배산성은 배산의 산허리를 돌로써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2017년 ~ 2018년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산 정상 바로 아래는 원형 집수지 2기가 발굴되었다.
배산성지는 동래고읍성(東萊古邑城, 수영구 망미동 부산지방병무청 일원) - 동래읍성(東萊邑城,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으로 이어지는 부산(동래) 지역 치소(治所)의 변천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유적이다.
참고로, 신라 시대 승려, 장수 겸 재상 거칠부(居柒夫, ?~579년)는 居柒夫, 荒宗은 실재 '겇부/겇보' '껓칠,끄칠' 등에 가깝게 불렸으리라고도 추정 가능한데 荒(거칠 황)은 '겇'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柒/七(일곱 칠)은 치읓.
T, 티읕과는 점 점 더 발음의 차이도 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겇'의 받침을 풀어 발음하면 '거치/거지/구지'가 된다. 朼(숫가락/수 비)는 사이시옷을 표시하고자 사용되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등장하는 '구지포례(久遲布禮)' 역시 거칠부의 다른 표기로 보이며, 또다른 표기법 '구례(久禮)'는 '구지포례'를 줄여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거칠부는 젊은 시절 승려가 되어 사방을 돌아다니다 고구려에 가 혜량의 강론을 듣고 이후 신라로 돌아와 벼슬길에 올라 대아찬이 됐고, 545년 7월(진흥왕 6년) 왕명을 받아 선비들과 함께 《국사》를 편찬하고 공을 인정받아 파진찬으로 승진했다.
551년(진흥왕 12년) 백제와 연합하여 8명의 장군과 함께 고구려를 침공해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빼앗았고 고구려의 승려 혜량과 함께 신라로 돌아와 최초의 승통이 되게 했다. 576년(진지왕 원년) 상대등으로 승진했고 78세로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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