緣! 素文! 전통배 해남 완도선 발굴 40년을 돌아보다···해남 산이면 진산리 생산 초기고려청자 3만점 쏟아진

류임현 기자 승인 2024.11.27 01:58 | 최종 수정 2024.11.27 02:35 의견 0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 복원 전시 중인 완도선.

1983년 12월 8일 잠수사 김용열(당시 42·여수시 국동)씨 일행은 손에 청자 4점을 들고 순천 검찰지청을 찾았다. 이들은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앞 해저에서 키조개를 캐다가 청자 4점을 건져올렸다. 작업 현장에는 더 많은 청자 무더기가 있다”고 진술했다.

당시 김인식 검사는 완도군 문화공보실 직원 등과 같이 현장으로 출동했고 김씨가 지목한 해역을 확인한 결과 수심 15m 해저에 청자가 묻혀 있었고 현장에서도 추가로 17점을 인양했다. 곧바로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이 주관하는 긴급 발굴단이 꾸려졌으며 12월 혹한에도 발굴이 진행됐다.

그러나 청자를 실었던 배는 찾아내지 못하고 2주간에 걸친 1차 발굴은 종료됐었다. 1976년 수중 발굴된 신안선은 국내 최초이나 사실상 한 세대나 뒤인 1323년 원나라 경원에서 출발하여 고려를 경유 일본으로 건너가던 중국 상선이었던 만큼 발굴단은 내심 완도에서 우리 선박이 발굴되길 기대했었던 것이다.

완도선은 이듬해 3월 26일 2차 발굴에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작업일지에는 “선상에서는 함성이 울렸다”고 감동을 적었다. 완도선은 우리나라 최초로 수중에서 발굴된 한선(韓船·우리나라 전통 선박)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12세기의 고려 선박인 완도선은 길이 9m, 너비 3.5m, 깊이 1.7m에 달하는 목재 범선으로, 10톤 규모로 추정된다. 완도선에는 끝부분이 마모된 청동 숟가락, 철제솥, 손때 묻은 나무망치, 나무 함지박 등 고려 선원의 선상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도 적재되었고 발굴되었다.

모두 3만 701점의 유물이 실렸으며 청자가 3만 646점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청자는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돼 ‘산이유형 청자’로 불린다. 실제 해남 산이면 일대에서는 106기에 달하는 청자 가마터가 발굴·발견됐다.

한국의 전통 배의 고려청자가 처음으로 확인된 완도선(船) 이야기다.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산이유형 ’초기 고려청자'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산이유형 ’초기 고려청자'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산이유형 ’초기 고려청자'

청자 장고를 포함한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산이유형 ’초기 고려청자'

완도선 물품 항아리의 경우 물품분립 꼬리표(목간)이 첨부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목간이 같이 발굴되었다. (왼쪽)
새상품 청자 그릇 포장법 (오른쪽).

지난 7일에는 한선(韓船·우리나라 전통 선박)의 역사와 발달 과정을 밝히는 데 큰 역할을 한 완도선의 발굴 40주년을 맞아 그 의미와 활용 방안을 고민하는 자리로 국립해양유산연구소 및 완도군이 완도군의 생활문화센터에서 '완도선 발굴 40주년 기념 해양 실크로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국내외 연구자를 초청해 완도선 발굴의 의의와 가치를 재조명하는 행사를 연 것이다.

행사는 연구소에서 30여년간 다양한 수중 발굴 조사와 연구를 이끈 김병근 전 팀장이 완도선 발굴의 가치와 미래를 주제로 한 기조 강연으로 시작되었다.

완도선 발굴현장 (사진 : 국립해양유산연구소 기록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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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선 복원 모형 [국립해양유산연구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 복원 전시 중인 완도선.

그동안 수중 발굴한 한선의 현황, 완도선에서 찾은 고려청자의 가치와 위상, 완도 해역의 해양사적 의미 등을 연구한 주제 발표가 이어졌다.

대만의 문화부 문화유산국, 일본의 데이쿄(帝京)대 문화재연구소 소속 연구자들도 참여해 자국의 수중 고고학 연구를 소개하고 완도의 해양 유적 활용 방안을 함께 논의했다.

연구소 관계자는 "완도선 발굴은 수중 발굴사에 매우 중요한 사례"라며 "완도선의 가치를 제고하고, 향후 보존·활용 방안을 탐구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12세기(1101년~1200년) 무렵 빚어져 팔려나가게될 상품들을 잔뜩 싣고 해남 화원 산이면 진산리를 출발한 배는 완도의 어두리 앞 바다에서 그만 빠뜨려져 800년도 더 지난 20 세기말 후손들에게 '초기 고려청자'를 비롯한 그 모습들로 나타나며 목도 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메이드 인 챠이나도 본 차이나도 아닌 실로 메이드 인 고려, 본 고ㄹㅣ(고려, 꼬레), 본 코리아로 불려야 될 비취옥색 비색(翡色) 토기 고령토 자기 항아리 본연의 연원을 알리려(?) 남해 거제섬이 바라다 보이는 그 곳 왕골섬 완도(莞島) 앞 바다에서 빠뜨려져 나타난 것이다.

12세기(1101년~1200년) 무렵 빚어져 팔려나가게될 상품들을 잔뜩 싣고 해남 화원 산이면 진산리를 출발한 배는 완도의 어두리 앞 바다에서 그만 빠뜨려져 800년도 더 지난 20 세기말 후손들에게 '초기 고려청자'를 비롯한 그 모습들로 나타나며 목도 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메이드 인 챠이나도 본 차이나도 아닌 실로 메이드 인 고ㄹㅣ(고려, 꼬레), 본 코리아로 불려야 될 비취옥색 비색(翡色) 토기 고령토 자기 항아리 본연의 연원을 알리려(?) 남해 거제섬이 바라다 보이는 그 곳 왕골섬 완도(莞島) 앞 바다에서 빠뜨려져 나타난 것이다.

1323년 원나라 경원에서 출발하여 고려를 경유 일본으로 건너가던 중국 상선 신안선에 실려 있던 14세기 고려청자.
상감 기법 문양의 베개, 그릇, 잔, 받침, 뚜껑, 연꽃무늬 장식 매병, 사자모양 연적 7개의 고려청자가 인양되었다.

신안선 고려청자 상감 기법 문양의 베개.
고려청자는 당시 동양은 물론 서구에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관련기사 링크

http://sharimanzu.today/View.aspx?No=3456919

http://sharimanzu.today/View.aspx?No=3282157

http://sharimanzu.today/View.aspx?No=3284516#

류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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