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기증받은 유해·증명서 사진 공개
김대건 신부 등의 유해
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김대건 신부 등의 유해가 담긴 유해함이라며 공개한 사진.
위쪽에 보이는 것이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인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의 머리카락이고 아래쪽에 보이는 것이 김대건 신부의 발뼈 조각 일부라고 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는 설명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이하 '주교회의'로 표기)는 성 김대건(1821∼1846) 안드레아 신부의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유해 일부를 확보했다고 2일 밝혔다.
주교회의에 따르면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가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인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의 유해와 함께 보관하다 체계적이고 안전한 보존을 염원하며 올해 2월 19일 주교회의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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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성화 [문학진 서울대 명예교수 作. 1983]
이들의 유해는 유해함에 담겨 유해 증명서 액자 내부에 보관된 상태로 주교회의에 전달됐다. 주교회의는 증명서와 유해가 보이는 유해함의 사진을 이날 공개했다.
주교회의는 유해가 앵베르 주교·모방 신부·샤스탕 신부의 머리카락과 김대건 신부의 발뼈 조각 일부가 확실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밝혔다. 사제 3명의 모발은 개별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한묶음으로 돼 있다.
주교회의는 이와 관련해 유해 증명서에는 "공인된 장소에서 추출된 유해를, 수정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금된 은제 유해함에 경건하게 안치하여 잘 닫고, 붉은색 비단 끈으로 묶어 인장으로 봉인"했다는 취지로 기재돼 있다고 전했다.
또한 이 문서에는 발급자인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서명과 함께 공식 인장이 압인돼 있으며 상서국장 조제 신부의 서명이 함께 있다고 덧붙였다.
날짜는 1925년 12월 16일이라고 표기돼 있다. 이는 순교한 4명의 사제가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된 지 약 5개월 지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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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등의 유해와 증명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김대건 신부 등의 유해가 담긴 유해함과 증명서라며 공개한 사진. 화면 왼쪽에 있는 것이 유해함이다.
유해함에는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인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의 머리카락과 성 김대건 신부의 발뼈 조각 일부가 담겨 있다고 한국 천주교주교회의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는 설명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다만 증명서에 수기로 적은 내용 중 일부는 글자가 흐려져서 내용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상태다.
주교회의는 해당 부분이 "산화돼 정확한 판독이 어렵고, 여러 차례 접힌 곳에는 종이가 바스러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며 전문가의 조언을 토대로 "이른 시일 안에 보존 처리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주교회의 관계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와 관련된 문제를 전수 조사하는 중인데, 공적으로 확인할 증명서가 있다는 점에서 사료 가치가 크다"고 설명했다.
김 신부의 유해는 순교 후 최소 200곳 이상으로 분산된 것으로 전해진다. 누가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 전체적인 실태가 파악되지 않은 가운데 2022년 인터넷 사이트에 김 신부의 척추뼈를 판다는 글이 올라와 논란이 일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김 신부의 유해 관리 실태를 전수조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 기해박해는 1839년(헌종 5)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이다. 기해사옥(己亥邪獄)이라고도 한다.
1839년 4월 18일, 사학토치령(邪學討治令)에 의해 본격화되어, 같은 해 11월 23일에 척사윤음(斥邪綸音)을 계기로 대부분의 지역에서 1840년 1~2월까지 종결되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1841년까지도 계속되었다. 사교(邪敎로 규정한 천주교를 배척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박해를 전후하여 안동 김씨에서 풍양 조씨로 세도 정권의 주도 세력이 바뀌었다.
신유박해를 일으켰던 김대왕 대비는 순조의 계증조모(繼曾祖母)로 경주 김씨이며 노론 벽파(僻派)에 속하는데, 1802년에 안동 김씨로 노론 시파(時派)로도 분립되는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순조의 왕비가 되자 시파가 주도하는 정국으로 변화하였다.
사실상 시파인 안동 김씨는 천주교를 싫어하는 벽파와는 달리 관용적인 편이었고 따라서 헌종 즉위 초기에는 천주교에 그다지 개의치는 않았다.
순조의 아내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아버지 김조순이 1832년에 죽고 2년 뒤 순조가 죽자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당시 정사를 적극적으로 보필한 사람이 대비의 오빠인 시파 안동 김씨 김유근(金逌根)이었고, 김유근은 천주교에 관대한 정책을 썼다.
그러나 김유근이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자 정권은 천주교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넘어갔다.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와 마찬가지로 가혹한 방법으로 천주교를 근절하려 한 대학살이었으며, 그 이전의 그 어느 박해보다 전국적인 것이었다.
김유근의 죽음과 교인을 가장한 김순성(金淳性)의 배신 행위로 유진길, 정하상(丁夏祥), 조신철(趙信喆) 등 조선교회재건운동의 중요 인물로 선교사의 측근 요인들이 잇따라 잡혔으며, 수원으로 피신했던 주교 앵베르(Imbert, L.M.J., 范世亨)는 ‘상게(상괴)’라는 동리에 숨어 있다가 배신자들의 책동질과 고발로 8월 11일 포교 앞에 자현(自現)하였다.
우의정 이지연은 이 사건을 의금부가 취급하게 해 줄 것을 청하고 또한 서양인 3명 가운데 모방(Maubant)과 샤스탕(Chastan)이 남도(南道)로 갔다하니 빨리 포교를 보내야 된다 고하였고, 대왕대비는 국청(鞫廳)을 차리는 것보다는 우선 포청으로 하여금 형벌로 신문 및 조사하고 빨리 포교들을 남도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 국청(鞫廳) :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역적(逆賊) 등의 중죄인(重罪人)을 신문(訊問)하기 위하여 설치(設置)하던 임시(臨時) 관아(官衙).
서양인 신부 모방과 샤스탕의 체포가 지연되자 조정은 종래의 오가작통법을 충청도에서 엄격히 적용하라는 훈령을 내렸고, 주교 앵베르는 교인들이 고초를 당하고 두 신부의 검거 조처가 날로 엄해지자 두 신부에게 쪽지를 보내어 자현을 권고하였다.
▶ 오가작통법 (五家作統法)은 조선에서 시행된 행정 구역 체계로, 조선초 더 앞 서 발의되었으나 세조 때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실시되었고 1485년에 한명회에 의해《경국대전에 등재되었다.
조선의 백성들을 5가구(오가)를 한 단위로 서로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제도로, 쉬운 이해를 돕자면 북한의 "오호감시제"가 그 나쁜 전래 양태로 볼 수 있다.
두 신부는 9월 6일 충청도 홍주(洪州)(현, 홍성군)에서 자수하였고 서울에서 파견된 손계창(孫啓昌)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3명의 프랑스 선교사는 포도청을 거쳐 의금부로 이송되었으며 그들의 안내자로 알려진 유진길, 정하상, 조신철 등과 함께 추국(推鞫)을 받게 되었다.
이때 선교사들은 각각 국적과 입국 목적을 명백히 하였으나 서울에 들어와 정하상의 집에서 거처했다는 사실만을 자백하고 그 밖의 물음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열지 않았고, 이에 대왕대비는 진상을 밝힐 다른 단서도 없다하여 3 명의 프랑스인 선교사에게 군문효수(軍門梟首)의 극형을 내렸고 9월 21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집행되었다.
기해박해로 천주교의 지도급 인물이자 동시에 남인에 속한 인물들이 다수 처형되었고, 이제까지의 세도 정국을 주도하던 안동 김씨가 일시적 몰락하고 풍양 조씨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후 조씨의 세도 정치는 1849년 헌종이 죽고 철종이 들어설 때까지 대략 10여 년간 계속되었다.
또한 다수의 교회 내 지도자들이 순교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은 신자들도 더욱 깊은 산골짜기로 숨어들면서 수많은 가재도구, 전답, 교회 서적과 성물 등이 압수되고 신자들의 경제적, 정치적 처지는 더 더욱 곤궁에 빠지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입국도 의주 변문을 통한 육로(陸路) 입국이 경계가 강화 되면서 백령도 인근을 경유하는 해로(海路)를 통한 입국을 시도하게 되었다.
사실상 조선 왕실 및 조정의 이 쇄국 정치의 전조는 결국 천주교도의 박해를 이유로 삼은 서강 열강 세력들의 개방과 강제 수교 조약 등 침공에 빌미가 되는 근현대사의, 일명 조선후기 역사의 정체(?)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