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창이 쓰였다는 얘기만 들었다"

"총알도 아까웠나"

…당진 학살 현장에 창날 추정 정체불명 금속 5개

더한문화유산연구원 조영선 조사연구팀장 "현재 상태로는 이 금속의 정확한 용도를 단정할 수는 없다"

1950년 10월 학살 민간인 유해 25구 발굴…탄피 10개가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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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도 아까웠나"…민간인 학살 현장서 나온 창날 추정 금속들
1950년 10월 민간인 집단학살이 자행된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서 15일까지 25구의 유해가 발굴된 가운데 당시 학살에 사용된 창날로 추정되는 금속 5개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2025.4.15

"총알이 아까워 죽창을 사용했다더니…"

소문은 소문을 낳았고 발굴된 것은 40cm 가량의 녹슨 금속이다.

15일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은골)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 발굴 현장 한쪽에서 창날로 추정되는 쇠붙이들이 드러났다.

지난 3일부터 유해 발굴이 진행 중인 이곳은 1950년 10월 초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적게는 80명, 많게는 300명이 학살된 장소이다.

지금까지 25구의 유해가 발굴된 가운데 40㎝가량의 녹슨 금속도 5개 발견된 것.

한쪽 끝이 뾰족한 이 금속의 반대쪽에는 나무가 끼워져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원형 고리가 있어, 학살에 사용된 창날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다만, 유해 발굴을 맡고 있는 더한문화유산연구원의 조영선 조사연구팀장은 "현재 상태로는 이 금속의 정확한 용도를 단정할 수는 없다"며 "학살에 죽창이 쓰였다는 얘기는 들었다"고 말했다.

얘기만 들었다는 썰에 대하여 발굴된 것은 40cm 가량의 창살형 금속으로 그 아래 끼워져 있던 나무의 정체는 현재 특정하기 힘들다.

이른바 NL파 혹은 PD파 학생운동가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던 죽창의 정체는 결코 "빨갱이 잡기" 부역의 창날의 대로 보기는 힘들며, 눈 가림과 교란을 위한 도구였을 수도 있어 더더욱 그러하다.

참고로, 소비에트 연방공화국 일명 소련은 1922년 12월 30일에 건국되었으며, 1911년경 국민당 정권이 세력을 키우던 중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중국 공산당이 1920년대부터 세력을 확장 중일전쟁을 계기로 국공합작 시기가 있었으나 1946년 제2차 국공 내전 이후 1949년 10월1일 마오쩌둥을 초대 국가주석으로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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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 만에 다시 빛 본 당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들
1950년 10월 민간인 집단학살이 자행된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서 15일 희생자들의 유해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에서는 지난 3일부터 25구의 유해와 함께 당시 학살에 사용된 창날로 추정되는 금속 5개가 발굴됐다. 2025.4.15

현장에서는 M1 소총 탄피 10개가량과 탄두 1개,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도 발굴됐다.

조 팀장은 "1990년대 대전전파관리소 당진사무소 관사를 지을 때 여러 구의 유해가 나와 이곳에 안장했다"며 "당시 안장된 유해는 모두 부식됐을 테고, 지금 발굴되는 유해는 다른 희생자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발굴 작업은 일단 이번 주까지 진행될 예정이며, 더한문화유산연구원은 당진시와 연장 여부를 협의하고 있다.

유해들은 감식을 거쳐 세종시에 있는 추모의 집에 안치된다.

5살 때 아버지를 잃은 임홍빈 희생자유족회장은 "유족들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을 피해 뿔뿔이 다른 곳으로 떠났다"며 "농사를 짓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학살된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도 할아버지나 아버지 시신조차 찾지 못한 유족들이 전국에 있다"며 "이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정부가 유해 발굴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